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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고개[泥峴]

 

진고개[泥峴]는 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2가 전 중국대사관 뒤편에서 세종호텔 뒷길에 이르는 고개로, 남산의 줄기가 뻗어 내려와 형성된 얕은 고개를 일컫는다. 원래 진고개라는 명칭은 이 고갯길의 흙이 몹시 질어서 비가 내리면 남산에서 흘러내린 계곡물이 범람해 지나다니기에 곤란하여 붙여진 것이다. 
진고개는 현재 충무로 일대를 말한다. 충무로는 일제강점기에 본정통(本町通)이라 칭하던 도로로, 1946년 10월 1일 일본식 지명을 우리말로 개정할 때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시호를 따서 충무로(忠武路)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 그 이유는 충무공 이순신의 생가가 이 부근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이 진고개 일대를 남산골이라고 불렀으며, 이 지역에는 주로 하급관료인 아전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갑신정변 이후로 일본인들의 주거지가 늘어나면서 일본에서 들여온 근대적 상품들이 선보여지는 곳이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이곳은 특권계층이 모여 사는 곳이라는 평판을 얻으며 일부 조선인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진고개 일대는 길이 불편하고 질어 1895년(고종 32)과 1906년에 2.4m 가량의 깊이로 파내어 진고개의 높이를 낮추고 길을 닦아 신식 도로를 만들었다. 이때 직경 1.5m의 하수관을 묻어 이 지역의 하수를 통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서울 시내 하수구의 시초가 되었다. 
1920년대에 일제가 서울을 개발하면서 이 일대를 번화가로 조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진고개는 깎여나가 평지가 되면서 고개는 사라지게 되었다. 고개가 없어진 뒤에도 한동안 명칭은 그대로 남아 쓰였지만, 충무로나 명동 등의 지명이 대세가 되면서 점점 잊혀져갔다. 지금은 주변 음식점의 상호 명칭으로나 그 흔적이 남아 있는 정도이다. 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8가길 32에 기념표지석이 있다.<서울 중구역사문화자원에서 인용>


진고개 굴우물
진고개 굴우물은 조선시대 진고개(현 충무로2가 세종호텔 자리)에 있었던 우물로, 한자로는 굴정(窟井)이라고도 하였다. 《한경지략(漢京識略)》에는 “굴정은 남부 이현(泥峴)에 있는데 우물이 깊고 굴이 있었기 때문에 그 명칭이 유래되었다”라는 기록이 전해진다. 굴정은 처음부터 우물로 사용했던 곳이 아니라 자연스레 노출된 샘물 같은 곳으로, 이를 처음 발견하여 만든 사람은 《지봉유설(芝峯類說)》의 저자 이수광(李睟光)의 아들인 동주(東州) 이민구(李敏求)였다. 1601년(선조 34) 이민구가 13살이었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진고개에서 놀다가 바위틈에서 맑은 물이 샘솟듯이 흐르는 것을 발견하고 동네 아이들을 모아 힘을 합쳐 우물을 파고서 가장자리를 돌로 둘러놓았다. 그 뒤부터 길을 가던 나그네들도 지나가다가 이 물을 마실 수 있게 되었는데, 항상 일정한 수위를 유지하던 우물의 물구멍이 점점 더 크게 파여지면서 굴 같은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그 뒤 이민구는 관직에 올라 경기도관찰사 등의 벼슬을 역임하고, 정묘호란(丁卯胡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을 치른 후 잠시 관직에서 물러나 있다가 어느 날 우연히 굴우물 앞을 지나게 되었다. 그는 까마득한 어린 시절에 아이들과 함께 파놓았던 그 우물이 어느새 고색창연한 우물이 된 것을 보고 감회에 젖어 가던 걸음을 멈추고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지었다. 손으로 뚫을 때는 한 줄기 샘물이었는데 어느덧 50년의 세월이 지나갔네. 돌 속의 한 줄기 샘물은 줄지 않았는데도 그 속에서 늙고 죽은 사람은 누구누구던가 이 시는 《동주집(東州集)》에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이를 통해서 굴정은 이민구가 만든 것임을 추측 할 수 있다.<서울 중구역사문화자원에서 인용>


 

▼ 진고개 표석

▼ 진고개 표석... 오래 전에 다녀온 곳이라 주변 환경이 많이 변했다. 뒤에 건물은 지금 샹프리스파 빌딩으로 변했다.

▼ 진고개 표석

▼ 진고개 표석

▼ 진고개 표석... 최근의 모습이다.

▼ 서울 중구 남산 일대의 표석 위치

▼ 진고개 표석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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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