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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성학교(順成學校)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인 사립여학교로 승동학교(承洞學校)라고도 한다. 갑오경장 이후 근대식 학교제도가 도입되면서 기독교계 학교를 중심으로 여러 신식교육기관이 설립되었으나 여성교육은 여전히 부실한 상태였다. 이에 1898년 9월 여학교 설립을 목적으로 북촌의 양반집 부인들이 주축이 되어 찬양회(讚揚會)라는 부인회를 조직하였다. 회장에 양성당 이씨, 부회장에 양현당 김씨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조직은 부인회원이 400명이었다.

이들은 부인회 안에 양성원(養成院)이라는 부를 두어 회원들의 회비로 여학교의 설립운영을 전담하게 하였으며, 「여학교 설시통문」을 발표하여 여성의 권리를 사회에 선언하였다. 이 「여학교 설시통문」은 일명 「여권통문(女權通文)」으로도 불리며 근대 여권운동의 3대 요소인 ‘참정권’·‘직업권’·‘교육권’의 목표가 분명히 제시되어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근대여권운동의 시발이 되었다. 이어 같은 해 12월 약 50여 명의 학생을 모집하여 승동에 순성학교를 설립하였다. 신교육을 받은 부인회 임원들이 직접 교육을 담당하였고, 서양인 여성 1명이 무급으로 교사를 자원했다.

초대 교장은 찬양회의 부회장인 양현당 김씨가 맡았고, 2대 교장은 1903년 자현당 이씨가 취임하였다. 1905년 12월 24일부터 31일까지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교장 이신원(자현당 이씨)이 사무원 한계창씨의 이론으로 교장직을 자퇴한다”는 광고를 끝으로 순성여학교에 대한 기사는 신문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초기 순성여학교의 학생들은 7·8세∼12·13세 연령층이었고, 교육과정으로는 「천자」· 「동몽선습」·「태서신사(泰西新史)」 등이 있었다. 이를 보면 순성여학교에서는 서당과 유사한 형태로 초보적인 한문교육을 실시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서양의 역사를 가르침으로써 한반도에 들어오고 있던 서양세력에 대한 이해를 도왔다. 이에 덧붙여 가정생활에 필요한 육아와 요리를 가르쳤고, 근대적 기구를 이용한 바느질법도 가르쳤다.

찬양회 회원들의 회비를 모아 건립한 순성여학교는 늘상 운영비 부족으로 허덕여야 했다. 여학생들은 의지할 곳 없는 처지에 있는 이들이 많아 학비를 제대로 낼 수 없었기 때문에 찬양회 회원들의 회비와 찬조금, 교장의 사재를 모아 학교를 운영하였다.

부인회에서는 이 학교를 관립으로 전환시키고자 여러 차례 정부에 상소문을 올렸다. 이에 따라 고종이 관립여학교의 설립에 착수하여 「여학교관제」를 제정하고 정부예산에도 책정이 되었다. 그러나 이 관제는 이유 없이 공포되지 않았고 책정된 예산도 집행되지 않았다. 따라서 순성학교는 심한 경영난에 빠지게 되어 1901년에는 일본인에게 교사(校舍)를 저당 잡히고 학교 운영비를 꾸려나가기도 하였다.

정부로부터 보조를 받은 것은 이 당시 경비를 갚지 못하고 교사를 비워주게 되었을 때 탄원하여 교사를 제공받은 것이 유일한 것이었다.

활동은 주로 대외적으로 여성교육운동에 이바지한 것이었으며, 실제 교육에 있어서는 충실을 기하지 못하였다. 이 학교는 여성들이 직접 설립한 최초의 민간인 설립 여학교로, 정부의 여성교육에 대한 무관심을 일깨우고 여학교 설립의 필요성을 사회 전반에 인식시키는 데 공헌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찬양회와 순성여학교 설립 결의 터(贊養會·順成女學敎 設立決議址) 표석

▼ 찬양회와 순성여학교 설립 결의 터(贊養會·順成女學敎 設立決議址) 표석...신한은행 백년관 건물 앞에 있다.

▼ 찬양회와 순성여학교 설립 결의 터(贊養會·順成女學敎 設立決議址) 표석

▼ 찬양회와 순성여학교 설립 결의 터 표석은 신한은행 백년관 앞 화단에 있어서 찾기는 쉽다.

▼ 찬양회와 순성여학교 설립 결의 터 표석 건너편 풍경

▼ 서울 중구 을지로 주변 표석 위치

▼ 찬양회와 순성여학교 설립 결의 터 표석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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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