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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소 터(鑄字所址)

 

주자소(鑄字所)는 조선시대 활자를 주조하거나 책을 찍어내던 일 등을 맡아보던 관청으로, 1403년(태종 3) 왕명에 따라 설치되었다. 주자소는 승정원(承政院) 직속기관으로 계미자(癸未字)를 비롯 정유자(丁酉字)·한구자(韓構字)·정리자(整理字)·임진자(壬辰字) 등의 다양한 활자를 주조하고, 서적의 인쇄에 활용하였다. 주자소 터는 주자소가 있던 곳으로,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퇴계로 173에 해당한다. 
조선의 개국과 동시에 반포된 새 관제에서도 고려의 서적원(書籍院)을 이어받아 책과 문서를 제작하게 하였는데, 서적원에서는 간단한 목판인쇄만을 담당하였다. 그런데 국가정책으로 유교를 진흥하기 위해서는 책을 다양하게 찍어 보급해야 했으므로 주자인쇄시설의 설치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런 필요에서 1403년(태종 3) 2월 왕명에 의해 주자소가 설치되었다.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 이직(李稷), 총제(摠制) 민무질(閔無疾), 지신사(知申事) 박석명(朴錫命), 우대언(右大言) 이응(李膺) 등으로 하여금 활자를 만들도록 하여 20만여 개에 달하는 계미자(癸未字)를 제작하였다. 
주자소는 1435년(세종 17) 경복궁 내로 이전하였다가 1460년(세조 6)의 관제개혁 때 전교서(典校署)로 개칭된 교서관(校書館)에 병합되었다. 이후 활자를 제작할 때는 임시로 주자도감을 설치하였다. 정조 때에 서적 출판이 활발해짐에 따라 별도로 감인소(監印所)를 설치하였으며, 다시 교서관을 창덕궁 돈화문 밖으로 옮기고 주자소를 분리시켜 창경궁 홍문관 자리에 설치하였다. 이어 1800년(정조24)에는 의장고(儀仗庫) 자리로 이전하였다. 
주자소에는 관리책임자인 승지(承旨)와 교서(校書)·교리(校理) 외에도 각각의 역할과 직제에 따라 수십 명의 관련 인원들이 근무하였다. 주자소의 기술자인 주자장(鑄字匠)은 장인이면서도 대우가 좋았고, 그의 처자에게도 월료(月料)를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주자소에서 계미자 외에도 정유자(丁酉字)·한구자(韓構字)·정리자(整理字)·임진자(壬辰字) 등의 다양한 종류의 활자를 만들었는데, 이들 중 일부는 아직까지 남아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주자소는 한성 남부 훈도방(薰陶防)에 속해 있었는데, 주자소가 있던 이곳은 지금의 주자동(鑄字洞)이 되었다. 주자소가 있던 곳은 서울특별시 중구 퇴계로 173 일대로, 남산스퀘어빌딩 화단에 1986년에 설치한 주자소 터 표지석이 있다. <서울중구역사문화자원에서 인용>

 


 

▼ 주자소 터(鑄字所址) 표석

▼ 주자소 터(鑄字所址) 표석... 남산스퀘어빌딩 앞 화단에 있다.

▼ 주자소 터(鑄字所址) 표석

▼ 주자소 터(鑄字所址) 표석 주변 좌,우 모습

▼ 주자소 터(鑄字所址) 표석 위치... 앞쪽의 택시승강장이 없어지고 자전거 도로가 났으며... 균역청 터 표석이 화단쪽으로 이전하였다. 

▼ 서울 중구 충무로역 주변 표석 위치

▼ 주자소 터(鑄字所址) 표석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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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