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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의병 발원터(丁未義兵發源地)

 

정미의병(丁未義兵)은 1907녀에서 1910년 사이에 일어난 고종(高宗)의 강제퇴위와 정미7조약(丁未七條約) 체결, 군대해산 등을 계기로 일어난 일련의 구국항일무력전의 총칭이다. 정미의병발원(丁未義兵發源) 터는 1907년 군대해산령에 분격한 시위대(侍衛隊)의 대대장 박승환(朴昇煥, 1869~1907)이 자결하자 한국군인들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의병투쟁을 촉발시킨 장소이다. 이를 계기로 전국각지에서 구국항일의병이 일어났다.
정미의병발원(丁未義兵發源) 터는 현재 서소문동 부영빌딩 인근으로, 1907년 군대해산령을 계기로 시위대(侍衛隊) 장병들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장소이다. 이 전투에서 패한 군인들이 전국 각지로 내려가 의병에 참가하거나 스스로 의병을 조직하였는데, 이 의병을 정미의병(丁未義兵)이라 부른다. 1905년 통감부(統監府) 설치 이후 조선병합을 서두르던 일본은 1907년 6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高宗)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을 강제로 체결한 뒤 대한제국의 마지막 무력인 군대를 해산시켰다. 군대해산일 당일에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朴昇煥, 1869~1907)의 자결을 계기로 해산된 군인들은 서울·원주·강화 진위대 등지에서 봉기하는 한편, 무기를 가지고 각지의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 해산된 군인들의 의병 참여로 당시 일본의 탄압으로 침체 상태에 있던 의병활동은 그 규모와 성격적 측면에서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우선 군인들의 참여로 무기와 병력이 크게 강화되었고, 또 전술의 발전도 가져왔다. 특히 일본군이 조선의 지형에 어두운 점을 이용하여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벌인 게릴라전술은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을 무력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와 같이 군인들의 참여로 크게 고양된 의병활동은 일본이 1910년 10월 남한대토벌작전(南韓大討伐作戰)을 벌이기까지 전민족의 전국적인 항쟁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이후 의병 구성에서 종래의 유생 중심에서 벗어나 농민·하급 해산군인·천민·노동자 등이 대거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군대 해산일에 자결한 박승환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또한 1993년 서소문동 서울상공회의소 일대 부영빌딩 앞 화단에 이를 기념하는 표지석이 세워졌다.<서울시 중구역사문화자원에서 인용>

 


 

▼ 정미의병 발원터(丁未義兵發源地) 표석

▼ 정미의병 발원터(丁未義兵發源地) 표석은 부영빌딩 앞 화단에 있다.

▼ 정미의병 발원터(丁未義兵發源地) 표석 위치

▼ 서울 중구 서소문 일대 표석 위치

▼ 정미의병 발원터(丁未義兵發源地) 표석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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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