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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홍문 터(八紅門址)

 

팔홍문(八紅門) 터는 조선의 이지남(李至男, 1529~1577)과 그 부인 등 3대에 걸쳐 8명의 자손이 효자·충신·열녀가 된 것을 기리기 위해 세운 8개의 정문(旌門)이 위치했던 곳으로, 현재의 서울시 중구 순화동 207-1번지 일대이다. 이지남(李至男, 1529~1577)은 조선 중기의 효자로, 본관은 연안(延安), 호는 영응선생(永膺先生)이다. 그의 아버지 이언침(李彦忱)은 1545년(명종 원년)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순창군수로 좌천됐다. 2년 후에는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과 관련하여 서천으로 유배됐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이때 이지남은 정성들여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고 3년간 여막살이를 해서 20살이 되기도 전에 지효(至孝)로 알려졌다. 이후 1577년(선조 10) 조정에 천거되어 소격서(昭格署) 참봉(參奉)이 됐으나, 어머니 안씨가 이질을 앓아 위중해졌다. 어머니의 오랜 병간호에 지친 이지남은 피를 토하다가 결국 그 해 8월에 죽고 말았다. 이지남에게는 이기직(李基稷)과 이기설(李基卨) 두 아들이 있었다. 맏아들 이기직은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죽었고, 시집간 딸도 애통해하다가 죽고 말았다. 이에 사람들이 이들의 효성을 조정에 알려 어머니 안씨와 부인 정씨, 아들 이기직과 이기설, 딸까지 6명의 효자문과 정문을 세웠고, 인조가 ‘효자삼세(孝子三世)’라는 편액을 내렸다. 그 후 병자호란 때 이기설의 아들인 이돈오(李惇五)와·이돈서(李惇敍), 이돈오의 처 김씨가 강화도에서 순절해 정려되었다. 이렇게 한 집안에 총 8개의 정문(旌門)이 세워졌다는 뜻에서, 8개의 효자문과 정문을 일컬어 팔홍문이라고 부른다. 처음 정려각이 세워진 것은 1634년(인조 12)으로, 이지남 등 6명이 정려된 이듬해였다. 김포 사촌(沙村, 사우리)에 정려각을 세우고 6정려를 봉안했으나 3년 만에 소실되었다. 1691년(숙종 17) 이기설의 처와 자식을 포함하여 8정려를 봉안했다가, 1734년(영조 10)에 서울 남문 밖 자인암(紫姻巖)으로 옮겼다. 그러나 집안이 가난하여 1763년(영조 39)에 김포 사촌으로 옮겼는데, 이를 안 영조의 명으로 1782년(정조 6)에 다시 자인암에 봉안했다. 이후 정려각을 중수하고 단청을 새롭게 하여 조선시대 말기까지 유지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정려각 자리가 서울역 철도부지로 지정되면서 종로 운니동으로 이전했다. 이후 파주 적성 마지리에 이돈오의 사당과 8정려각을 함께 신축·봉안했는데 6·25전쟁으로 소실됐다. 1968년에는 남양주 진건면 신월리 이돈오의 묘역에 8정려각을 재건했으나 붕괴됐고, 1984년 김포시 감정동에 13정려각으로 확장·복원한 이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서울 중구역사문화자원에서 인용>

 

 


 

 

▼ 팔홍문 터(八紅門址) 표석

▼ 팔홍문 터(八紅門址) 표석... 염천교교차로 북단에 있다.

▼ 팔홍문 터(八紅門址) 표석... 순화공원 남쪽 끝 서울역 방향 사거리에 있다.

▼ 옛날 팔홍문 터(八紅門址) 표석... 위치는 그대로 유지한 체 내용만 바뀌었다.

▼ 서울 중구 서소문, 남대문 일대 표석 위치

▼ 팔홍문 터(八紅門址) 표석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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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