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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백당 터(挹白堂址)

 

읍백당(挹白堂) 터는 조선 후기 광해군 때 영의정을 지낸 박승종(朴承宗, 1562~1623)과 그의 차남 읍백당 박자응(朴自凝, 1589~1645)이 살았던 집터이다. 박승종은 인목대비 폐모론을 적극 반대했던 인물로,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광해군의 부원군이었던 장남 박자흥(朴自興, 1581~1623)과 함께 자결하였다.

읍백당(挹白堂)은 박자응(朴自凝)의 호이다. 그는 광해군 때 영의정을 지낸 밀양부원군 퇴우당(退憂堂) 박승종(朴承宗)의 차남이며, 광해군의 부원군이었던 박자흥(朴自興)의 동생이다. 이곳은 박승종과 박자응 부자가 살았던 집터이다. 박자응은 1609년(광해군 1) 사마시에 합격하고, 161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 및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을 거친 뒤 1617년에는 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세자시강원문학을 역임하고 1618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이 되었다. 이때 인목대비의 폐출론이 대두되자 박자응은 신병을 핑계로 불참한 이유로 이듬해 고산현감(高山縣監)으로 좌천되었다. 1620년 영광군수를 거쳐, 그 뒤 홍문관수찬·정자(正字)·교리·응교(應敎) 및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장령(掌令) 등을 역임하였다. 1623년 마침내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아버지 박승종과 형 박자흥은 함께 자결하고, 박자응은 제주로 유배되었다가 이재영(李再榮) 등의 공사(供辭, 심문조서)에 의해 그의 급제가 차술(借述, 남의 글을 빌려서 서술함)임이 밝혀져 과거 합격자 등록에서 삭제되었다. 1628년(인조 6) 진도로 이배된 뒤 이듬해 위리(圍籬, 죄인의 유배장소를 가시 울타리로 둘러치던 것)만 철거되었다.<서울중구역사문화자원에서 인용>

 

 


 

 

▼ 읍백당 터(挹白堂址) 표석

▼ 읍백당 터(挹白堂址) 표석... 남학당 마을마당 작은 공원에 있다.

▼ 읍백당 터(挹白堂址) 표석은 예전 중앙정보부 입구에 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중앙정보부 건물을 TBS 교통방송국이 있었는데 지금은 건물을 철거하고 그자리에 '남산예장자락보행공원'이 들어섰다. 하루가 무섭게 변화되고 있어 기념표석도 최소 1년에 한번은 돌아봐야 최신자료를 올릴 수 있게 된다.

▼ 읍백당 터(挹白堂址) 표석... 남산1호터널에서 내려오는 길에 만난다. 서울소방재난본부 건물도 과거 중앙정보부 건물이었는데 다른 건물은 다 철거되었는데 이 건물만 살아 남았다. 건물도 입지가 좋아야 오래 산다.

▼ 읍백당 터(挹白堂址) 표석... 한국예술사관실용전문학교 앞에 위치하는데 찾기가 만만찮다.  이곳 방문은 차량으로 가면 주차할 곳이 만만찮다. 자전거로 남산 순환도로에서부터 내려오면서 돌아보아야 조금 편하다.

▼ 서울 중구 남산 부근 기념표석 위치

▼ 읍백당 터(挹白堂址) 표석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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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