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윤선도 집터(尹善道家址)

 

윤선도선생(尹善道先生) 집터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인인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8세에 양자로 들어가 살았던 숙부의 집이 있던 곳이다. 윤선도는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벽지의 유배지에서 보냈으나, 글을 짓는데 능하여 정철(鄭澈)과 더불어 조선시대의 시가문학의 2대 시인으로 불린다. 현재의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길 73에 해당한다.

윤선도선생(尹善道先生) 집터는 정철(鄭澈)과 더불어 조선시대 2대 시인으로 불리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어린 시절을 보낸 집이 있던 곳이다. 윤선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인으로,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이다. 1587년(선조 20) 6월 22일 한성부 동부 연화방(蓮花坊)에서 태어났다. 윤선도는 8세 때 작은아버지인 윤유기(尹唯幾)의 양자로 들어가 유교 경전을 비롯 역사, 의약, 음양, 지리 등을 두루 공부하였다. 이때 《소학(小學)》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게 되었다. 26세이던 1612년(광해군 4) 진사시에 급제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었으나, 1616년(광해군 8) 12월 예조판서 이이첨(李爾瞻)의 횡포를 책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었다. 국경의 귀양지에 중국인과 내통하는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1618년(광해군 10) 죄인들을 남쪽으로 옮겼는데, 이때 윤선도도 경상도 기장으로 이배(移配)되었다. 윤선도는 1628년(인조 6)에 별시에 장원 급제하여 봉림대군(鳳林大君)과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스승이 되었다. 그 뒤 5년간 공조좌랑, 형조정랑, 한성부서윤 등을 지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윤선도는 의병을 모아 강화도로 가다가 길이 막혀 해남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인조(仁祖)가 청에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실망하여 이듬해 2월 제주도로 떠났다.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보길도(甫吉島)에 잠시 내렸다가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섬에 눌러앉기로 하였다. 윤선도는 자신이 머물던 마을 일대를 ‘부용동(芙蓉洞)’이라 하고 격자봉 아래에 집을 지어 낙서재(樂書齋)라는 이름을 붙였다. 윤선도는 자연 속에서 한가로운 생활을 즐기면서 많은 시가들을 지었다. 1659년(효종 10) 효종이 사망하자 임금의 능을 쓰는 문제와 자의대비(慈懿大妃)의 상복 기간을 둘러싸고 윤선도가 속한 남인과 송시열(宋時烈)이 이끄는 서인 사이에 치열한 당쟁이 일어났다. 이 싸움에서 남인이 패해 윤선도는 다시 함경도 삼수(三水)로 유배당했다. 1665년(현종 6) 전라도 광양으로 이배되었다가 2년 뒤에 풀려난 윤선도는 80이 넘은 나이에 보길도로 내려가 머물다가 1671년(현종 12) 6월 11일 낙서재에서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서울중구역사문화자원에서 인용>

 

 


 

 

▼ 윤선도 집터(尹善道家址) 표석

▼ 윤선도 집터(尹善道家址) 표석.... 이 표석이 위치한 건물과 뒤의 YWCA 건물은 최근에 많이 바뀌어 새로운 사진을 올려야 할듯 하다. 새로운 사진을 찍게 되면 내용을 수정할 예정이다.

▼ 현재의 윤선도 집터(尹善道家址) 표석 주변 현황(2021년 1월)

▼ 현재의 윤선도 집터(尹善道家址) 표석 주변 현황(2021년 4월)

▼ 서울 중구 무교동, 을지로, 명동 일대 표석 위치

▼ 윤선도 집터(尹善道家址) 표석 위치

728x90
반응형
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