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

 

올 가을 전라도 답사를 하면서 우연찮게 여함 신경준선생 묘를 찾게 되었다. 우리가 지금도 아주 유용하게 활용하고 있고 우리 산천의 자존심을 심어주고 있는 산경표를 작성하신 분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신경준 선생 묘를 본 순간 다른 일정을 접고 여암선생 묘를 찾아 나섰다.

묘역 답사는 사전에 준비를 철저히 해서 현장에서 시행착오를 최소로 하는게 기본인데 이렇게 갑자기 찾아 나서면 여러가지로 혼란이 오기 마련이다.

이곳은 비교적 안내판이 잘 되어 있어서 쉽게 접근을 했는데 마지막 안내판을 누가 치워버려서 조금 헷갈렸다. 그러나 큰 무리없이 찾았는데 묘역을 보고는 많이 실망한 곳이다.

인터넷에 소개된 묘역은 비교적 관리가 잘 되어 있었는데 이번에 찾은 묘역은 대나무가 묘역 가득 들어차 있고 봉분 주위까지 뿌리를 뻗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올 추석에 벌초를 했는지 봉분 주위에는 잡풀이나 대나무가 없었는데 한 해 만 관리를 안하게 되면 대나무에 묻힐 것으로 보인다. 관리자는 주변 대나무를 모두 베어내고 그 사이에 있는 소나무가 살아날 수 있도록 해야할 듯 보인다.

이곳은 맥이 급하게 내려오는 곳으로 좌우 용호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바람을 갈무리 하기 곤란하고 앞쪽 섬진강이 반궁수로 묘역을 치고 들어오는 곳이다. 앞쪽에 비보림을 조성한 것은 좋으나 대나무로 비보하는 것은 관리가 조금만 부실해도 묘역을 뒤덮기 때문에 주의 해야 한다.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순민(舜民), 호는 여암(旅菴). 아버지는 신숙주(申叔舟)의 아우 말주(末舟)의 10대손인 진사 내(淶)이며, 어머니는 한산이씨로 의홍(儀鴻)의 딸이다.33세 때까지 여러 곳으로 옮겨다니며 살다가 33세부터 43세까지 고향에 묻혀 살면서 저술에 힘썼다. 그의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운해훈민정음(韻解訓民正音)』(세칭 훈민정음운해)을 꼽을 수 있다.43세 되던 1754년(영조 30) 비로소 향시에 합격했는데 당시의 시험관은 홍양호(洪良浩)였다. 그 해 여름 증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상경 후 홍양호와의 교분이 두터웠다. 과거합격 후 정언·장령·현감 등을 역임한 다음 1769년 종부시정(宗簿寺正)이 되어 강화의 선원각(璿源閣)을 중수한 뒤 일단 고향에 돌아갔다.그러나 곧 영조의 명으로 『여지승람(輿地勝覽)』을 감수하고, 1770년에는 문학지사(文學之士) 8인과 함께 『문헌비고』를 편찬할 때 <여지고 輿地考>를 담당하였으며, 이어서 그 해 6월 6일부터 8월 14일까지 『동국여지도(東國輿地圖)』의 감수를 맡았다.이후 승지·북청부사·순천부사·제주목사 등을 역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여생을 보낸 다음 1781년(정조 5) 70세로 일생을 마쳤다. 
신경준은 문자학(文字學)·성운학(聲韻學)·지리학(地理學) 등을 중심으로 다방면에 걸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언어와 관련된 저서로는 『훈민정음 운해(訓民正音韻解)』, 『일본 증운(日本證韻)』, 『언서 음해(諺書音解)』[동음해(東音解)라고도 함], 『평측운호거(平仄韻互擧)』 등이 있다. 『훈민정음 운해』는 훈민정음의 소리를 도표로 작성하여, 훈민정음의 소리를 발음 기관과 관련지어 설명하고 있다.지리학과 관련된 분야의 저서로는 『강계지(疆界志)』, 『산수경(山水經)』, 『도로고(道路考)』, 『산수위(山水緯)』, 『군현지제(郡縣之制)』 등이 있다. 신경준은 조선 팔도의 산천 지리에 대하여 자세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양한 종류의 지리서를 지을 수 있었다. 이외에 『거제책(車制策)』, 『병선책(兵船策)』, 『수차 도설(水車圖說)』, 『논선거비어(論船車備禦)』 등 실용적인 목적을 위한 저술들도 있다.순창군 유등면 오교리 뒷산에 여암 신경준의 묘와 신도비가 있다.1910년 홍양호가 서문을 쓴 목활자본 신경준의 문집이 간행되었다. 신경준이 태어나고 자란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남산길 32-3[가남리 518-1]은 1994년 8월 10일 설씨 부인·신경준 선생 유지[귀래정 신말주 후손 세거지]라는 명칭으로 전라북도 기념물 제86호로 지정되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디지털순창문화대전에서 발췌>

 

문화재지정 미지정
문화재명칭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 묘
소재지 전북 순창군 유등면 오교리 산 15-2
관리자(연락처) 고령신씨

 

 

▼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 묘 용맥도... 묘역에 대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관리가 안되어 묘역 안쪽까지 대나무 뿌리가 뻗어있는 상태다. 좌우 용호가 막아주고 섬진강이 앞을 가로 막고 있어 좋아 보이지만 너무 가파른 경사지에 좌우 용호의 간격이 넓고 섬진강이 반궁수로 치고 들어오는 곳이라 여러 어려움이 내포된 곳이다.

 

▼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 묘 찾아가는 길... 철문 있는 곳으로 가면 수월하게 갈 수 있지만 이곳은 안쪽 수자원공사 건물에 사람이 있을 때만 열어 놓고 있어서 사용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모든 안내판도 반대쪽 산쪽에서 가도록 안내되어 있는데 이곳은 도로폭이 좁아 자동차가 교행하기 힘들다. 주말 같은 때는 조심해야 할 듯 보인다.

 

▼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 묘 안내판... 오교마을 입구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찾아갔다.

 

▼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 묘 전경

 

▼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 묘

 

▼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 묘갈...

 

▼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 묘 상석에는 두 부인의 묘표가 새겨져 있다. 신경준은 부인이 3명인데, 첫째부인 광주이씨 자식없음, 둘째부인 강릉최씨, 셋째부인 평창이씨 자식 2남3녀, 장녀 夫진사이영갑(최씨女), 장남 재권, 차남 두권, 차녀 夫이호연(이씨女), 3녀 夫윤치정(이씨女)이다.<公凡三娶。元配廣州李氏。蔭郞亨晩女。早卒無子。次配江陵崔氏。學生惇五女。後配平昌李氏。蔭郞光潗女。有二男三女。長女歸進士李永甲崔出。男在權斗權。二女歸李浩淵,尹致鼎。並李出。(신경준 묘갈 中)>

 

▼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 묘비

 

▼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 묘비.. 셋째 부인 평창이씨와 합장이다. 

 

▼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 묘갈... 묘갈은 대제학 홍양호(洪良浩)가 지었는데 신경준이 43세때 향시에 합격했는데 당시의 시험관이 바로 홍양호(洪良浩)였다. 아마도 그 이후 홍양호와의 교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보인다.

 

▼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 묘 석물

 

 

▼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 묘 석물

 

 

▼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 묘 입수도두... 

 

▼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 묘 후경... 최근 몇 년 사이 묘역이 관리가 안된 상태로 보낸듯 보인다. 묘역에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고 묘역 안쪽까지 뿌리를 뻗고 있다. 4~5년전 사진을 보면 그런대로 잘 관리되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는듯 보인다.

 

▼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 묘역 아래 섬진강...

 

▼ 섬진강 건너에서 바라본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 묘

 

▼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 묘 동영상

 

 

728x90
반응형
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