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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李陸史) 묘

 

안동지방 묘지답사를 후배와 함께 1박2일로 다녀왔습니다. 첫날 묘지답사를 순차적으로 잘 진행했는데 농암 이현보선생 묘를 갔는데 너무 높고 그 묘역을 관리하는 분이 아직 벌초를 안했다고 들어가기 힘들거라는 말을 해서 묘역 입구에서 뒤돌아 내려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시간의 여유가 생겼는데 코스를 토계리쪽으로 잡아서 갑자기 이육사 묘를 가자고 의기 투합하여 별안간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이육사 묘는 문학관으로 진입하여 왕복 1시간30분이 소요되는 곳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묘지를 다녀오려면 최소한 그 시간만큼은 고려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평소 다녀오고 싶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던 이육사 묘지였는데 갑자기 실행에 옮겼습니다.
혹시나 시간이 늦어 못갈까봐 문학관은 패스하고 우선 묘역을 먼저 올랐습니다. 10여년 전에 묘역을 오르려고 하다가 그때도 늦가을이었는데 솔직히 겁이나 못갔었는데 오늘도 가을 오후 늦은시간 가을바람이 싸하게 불어와 혼자라면 포기했을 것인데 후배와 함께해서 겁없이 올랐습니다.

 

 

사실 올라가면 별거 아닌데 오르기 전에는 시간에 압도당하고 산길이라 더욱 긴장하게 됩니다. 나역시 무릎도 시원찮고 숨도 가빠서 걱정했지만 쉬엄쉬엄 오르다보니 잘 정비된 산길에 중간중간 묘역 안내표지판도 잘 되어 있어서 쉽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육사는 1944년1월16일 베이징 일본총영사관 감옥에서 순국하였습니다. 그의 유해는 의열단 단원이자 친척이었던 이병희가 수습하여 화장했고, 연락을 받은 동생 이원창이 유골을 서울로 가져와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했다가 1960년에 지금 현재의 위치인 고향 원촌의 뒷산으로 이장되었습니다. 시인의 묘를 먼저 이장한 뒤에 문학관을 세우다 보니 문학관과 묘역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이육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묘역을 찾기 힘든게 사실입니다. 이왕이면 문학관 인근으로 모시는게 좋을 듯 합니다. 

 

 

시인의 묘소는 단촐하니 부인 순흥안씨와 쌍분으로 조성되어있는데 망주석 한쌍, 묘비, 상석 등이 갖춰져 있습니다. 어떤 연유에서 이곳에 묘역을 조성했는지는 모르지만 특별히 좋은 자리를 가려  쓴것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문학관은 코로나로 인해 휴관을 하고 있었는데 외부에 육사시비공원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찾았으나 안보였는데 나중에 보니 인근 원촌마을에 조성되어 있더군요. 예전에 왔을 때는 문학관만 보고 묘소는 못봤는데 이번에는 묘소만 보고 문학관은 못보는 상황이 조금 의아해지네요. 아무튼 이 상황에 직면하고 보니 이육사시인은 한꺼번에 두개는 동시에 열어주지 않나 봅니다. 

 

이육사(李陸史)
 
본관은 진성(眞城). 경상북도 안동 출신. 본명은 이원록(李源綠) 또는 이원삼(李源三). 원삼은 주로 가정에서만 불렀다고 한다. 개명은 이활(李活), 자는 태경(台卿). 아호 육사(陸史)는 대구형무소 수감번호 ‘이육사(二六四)’에서 취음한 것이다.
작품 발표 때 ‘육사’와 ‘二六四(이육사)’ 및 활(活)을 사용하였다. 아버지는 이황(李滉)의 13대 손인 이가호(李家鎬)이며, 어머니는 허길(許吉)로, 5형제 중 둘째 아들이다.
어려서 할아버지에게 한학을 공부하였고, 영천 소재의 옛 백학서원(白鶴書院)인 백학학교(白鶴學校)와 보문의숙(普文義塾)·교남학교(嶠南學校)를 다니고 1926년 북경 조선군관학교, 1930년 베이징대학[北京大學] 사회학과에 적을 둔 적이 있다 하나, 그 연도나 사실 여부가 확인된 것이 아니다.
경력은 항일운동가로서의 활약이 두드러지는데, 1925년에 형 이원기(李源琪), 아우 이원유(李源裕)와 함께 대구에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다.
1927년에는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이밖에도 1929년 광주학생운동, 1930년 대구 격문사건(檄文事件) 등에 연루되어 모두 17차에 걸쳐서 옥고를 치렀다.
중국을 자주 내왕하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3년 가을 잠시 서울에 왔을 때 일본 관헌에게 붙잡혀, 베이징으로 송치되어 1944년 1월 베이징 감옥에서 작고하였다.
문단 활동은 조선일보사 대구지사에 근무하면서 1930년 1월 3일자 『조선일보』에 시작품 「말」과 『별건곤(別乾坤)』에 평문 「대구사회단체개관(大邱社會團體槪觀)」 등을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뒤 1935년 『신조선(新朝鮮)』에 「춘수삼제(春愁三題)」·「황혼(黃昏)」 등을 발표하면서 그의 시작 활동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그 뒤 『신조선』·『비판(批判)』·『풍림(風林)』·『조광(朝光)』·『문장(文章)』·『인문평론(人文評論)』·『청색지(靑色紙)』·『자오선(子午線)』 등에 30여 편의 시와 그밖에 소설·수필·문학평론·일반평문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생존시에는 작품집이 발간되지 않았고, 1946년 아우 이원조(李源朝)에 의하여 서울출판사에서 『육사시집(陸史詩集)』 초판본이 간행되었다.
대표작으로는 「황혼」·「청포도(靑葡萄)」(문장, 1939.8.)·「절정(絶頂)」(문장, 1940.1.)·「광야(曠野)」(자유신문, 1945.12.17.)·「꽃」(자유신문, 1945.12.17.) 등을 꼽을 수 있다.
그의 시작세계는 크게 「절정」에서 보인 저항적 주제와 「청포도」 등에 나타난 실향 의식(失鄕意識)과 비애, 그리고 「광야」나 「꽃」에서 보인 초인 의지(超人意志)와 조국 광복에 대한 염원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의 생애는 부단한 옥고와 빈궁으로 엮어진 행정(行程)으로, 오직 조국의 독립과 광복만을 염원하고 지절(志節)로써 일관된 구국투쟁은 민족사에 큰 공적으로 남을 것이다.
“한발 재겨디딜 곳조차” 없는 “내 골ㅅ방”과 같은 육사의 의식 공간은 항시 쫓기고 있는 불안한 마음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빼앗긴 조국에 대한 망국민의 비애와 조국광복에 대한 염원을 그의 시에 새겨놓은 것이다.
1968년 시비가 안동에 건립되었다. 유저로 『육사시집』 외에, 유고(遺稿) 재첨가본 『광야』(1971), 그의 시와 산문을 총정리한 『광야(曠野)에서 부르리라』(1981)·『이육사전집』(1986) 등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미지정
문화재명칭
시인 이육사 묘(詩人 李陸史 墓)
소재지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산 4-1(주차:이육사문학관 주차장,왕복90분)
관리자(연락처)
이육사문학관

 

▼ 이육사(李陸史)문학관(文學館) 종합안내도

▼ 이육사(李陸史)문학관(文學館) 배치도

▼ 이육사(李陸史)문학관(文學館)

▼ 이육사(李陸史)문학관(文學館) 입구

▼ 이육사(李陸史)문학관(文學館) 전시관인 정신관... 지금은 코로나19로 휴관이다.

▼ 왼쪽이 이육사(李陸史) 생가를 복원한 육우당...

▼ 이육사(李陸史)문학관(文學館) 입구에 세워진 동상과 절정 시비(詩碑)

▼ 이육사(李陸史)문학관(文學館)에서 바라본 낙동강

▼ 이육사(李陸史) 묘(墓) 지도

▼ 이육사(李陸史) 묘(墓)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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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육사(李陸史) 묘(墓) 용맥도... 청룡에 바짝 붙어 기운을 얻고 있으나 앞쪽으로 계곡이 길게 이어져 있어서 설기(洩氣)되는 곳이다.

▼ 이육사(李陸史) 묘소(墓所) 안내문... 묘소까지 2.8km 왕복 90분 정도 걸린다.

▼ 이육사(李陸史) 묘소(墓所) 가는 길 안내표지판

 

▼ 이육사(李陸史) 묘소(墓所) 앞... 묘소는 뒤에서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 이육사(李陸史) 묘(墓) 전경... 이육사는 중국에서 화장하여 미아리에 초장 하였다가 1960년에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부인 순흥안씨와 쌍분이다.

▼ 이육사(李陸史) 묘(墓)는 전순이 짧아 한 화면으로 잡히기 힘들다. 이육사 묘

▼ 부인 순흥안씨(안일향) 묘(墓) 

▼ 이육사(李陸史) 묘비(墓碑)

 

▼ 묘비 3면 내용

 

▼ 이육사(李陸史) 묘(墓) 망주석

 

▼ 이육사(李陸史) 묘(墓) 측경

▼ 이육사(李陸史) 묘(墓) 측후경

▼ 이육사(李陸史) 묘(墓) 후경

▼ 이육사(李陸史) 묘(墓) 후경... 앞쪽 전순이 너무 협소하고 계곡풍이 우려되어 나무를 빼곡히 심어 조망이 안되고 있지만 햇빛은 양명하다.

 

▼ 이육사(李陸史) 묘(墓)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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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