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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호(白湖) 임제(林悌)

 

고등학교 때 입시 준비 하면서 청구영언, 해동가요에 실려 있다던 백호(白湖) 임제(林悌)의 시를 열심히 외웠던 기억이 난다. 다른 것은 다 잊어 먹었는데 이 시는 뭔가 나를 끄는 마력이 있어서인지 지금도 또렷이 외우고 있으니 무슨 조화인지...백호(白湖) 임제(林悌)는 자유분방해서 제도권에서 벗어나 있던 사람인데 어머님을 여의고 맘을 고쳐 먹은 뒤 속리산으로 가 성운선생을 만나고 나서 늦은 나이에 과거시험을 통과했다. 그런데 벼슬에 별 뜻이 없어서인지 관직은 크게 오르지 못했다. 그런데 시문을 아주 잘 지어서 당대의 석학들이 임제의 시를 보고 칭송이 자자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기녀 한우(寒雨)와 화답한 시조 ‘한우가’(寒雨歌)와 황진이 묘를 참배하고 지었다는 시가 가장 많이 회자된다.평생 황진이를 못내 그리워하고 동경하던 그는 마침 평안도사가 되어 임지로 부임하던 길에 병에 걸려 일찍 생을 마쳤다는 황진이의 소식을 듣고 절망하여 그길로 술과 잔을 들고 무덤을 찾아가 눈물을 흘리며 다음의 시조를 지어 애도했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웠난다.

홍안(紅顔)을 어디 두고 백골(白骨)만 묻혔난다.

잔(盞)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사대부가 일개 기생의 묘를 참배하고 시까지 지었다하여 파직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녀 한우(寒雨)와 화답한 시조 ‘한우가’(寒雨歌)를 소개하면 


북천(北天)이 맑다커늘 우장(雨裝)없이 길을 나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로다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얼어잘까 하노라  <임제의 시> 


어이 얼어자리 무슨 일로 얼어자리

원앙침 비취금을 어디두고 얼어자리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녹아잘까 하노라  <기녀 한우(寒雨) 화답시>


이번 전라도답사는 나주에서 하루를 묵고 해 뜨기 전부터 임제 묘를 답사했다.

아래에서 가파른 계단을 끝까지 가면 숨이 턱에 닫는다. 이런 곳은 주위 사격에 현혹되어 묘를 쓰는데 산정의 9부능선에 점혈해서 돌형(突形)으로 볼 수 있는데 빙고혈(凴高穴)에 해당된다. 바람이 무섭기 때문에 장풍이 잘 되는 곳에 조성해야 하는데 주변이 골짜기가 발달되어 바람들이 들락날락 하는 곳이다. 특히 안산이 없이 물을 끌고나가는 형국이라 재물이 매우 취약한 곳이다.  

 

 

백호(白湖) 임제(林悌)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자순(子順), 호는 백호(白湖)·풍강(楓江)·소치(嘯癡)·벽산(碧山)·겸재(謙齋). 아버지는 절도사를 지낸 임진(林晉)이다.
임제는 어려서부터 지나치게 자유분방해 스승이 없었다. 20세가 넘어서야 성운(成運)에게 배웠다. 1570년(선조 3) 22세 되던 겨울날 충청도를 거쳐 서울로 가는 길에 쓴 시가 성운에게 전해진 것이 계기가 되어 성운을 스승으로 모셨다고 한다.젊어서는 얽매임을 싫어하여 기녀와 술자리를 즐기며 살았다. 1571년(선조 4) 23세에 어머니를 여의었고 이때에 잠시 동안 술을 끊고 글공부에 뜻을 두었다. 과거에 몇 번 응시했으나 번번이 떨어졌다. 그로부터 계속 학업에 정진했으며 『중용』을 800번이나 읽은 일은 유명한 일화이다.1576년(선조 9) 28세에 속리산에서 성운을 하직하고, 생원·진사에 합격했다. 이듬해에 알성시에 급제한 뒤 흥양현감(興陽縣監)·서북도 병마평사(西北道兵馬評事)·관서 도사(關西都事)·예조정랑(禮曹正郞)을 거쳐 홍문관지제교(弘文館知製敎)를 지냈다. 그러나 성격이 호방하고 얽매임을 싫어해 벼슬길에 대한 마음이 차차 없어졌으며 관리들이 서로를 비방 질시하며 편을 가르는 현실에 깊은 환멸을 느꼈다고 한다.그는 관직에 뜻을 잃은 이후에 이리저리 유람하다 고향인 회진리에서 1587년(선조 20) 39세로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 여러 아들에게 “천하의 여러 나라가 제왕을 일컫지 않은 나라가 없었다. 오직 우리나라만은 끝내 제왕을 일컫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못난 나라에 태어나서 죽는 것이 무엇이 아깝겠느냐! 너희들은 조금도 슬퍼할 것이 없느니라”고 한 뒤에 “내가 죽거든 곡을 하지 마라”는 유언을 남겼다. 검(劍)과 피리를 좋아했고 술 마시고 방랑하며 여인과 친구를 사귄 짧은 삶이었다.벼슬에 환멸을 느껴 유람을 시작했으며 가는 곳마다 많은 일화를 남겼다. 서북도 병마평사로 임명되어 임지로 부임하는 길에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가 시조 한 수를 짓고 제사지냈던 일과 기생 한우(寒雨)와 시조를 주고받은 일, 평양기생과 평양감사에 얽힌 일화도 유명하다. 이러한 일화로 인해 사람들은 그를 평가하길 기이한 인물이라고 했으며 또 한편에서는 법도에 어긋난 사람이라 했다. 그러나 당시의 상반된 평가와는 상관없이 그의 글은 높이 평가됐다.「수성지(愁城誌)」·「화사(花史)」·「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 등 3편의 한문소설을 남겼으며 문집으로는 『임백호집(林白湖集)』 4권이 있다. 한편, 한문소설은 그의 작품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미지정
문화재명칭 백호(白湖) 임제(林悌) 묘
소재지 전남 나주시 다시면 가운리 산 92-1(주차 가운리 141 창계서원)
관리자(연락처) 나주 임씨 백호공종중

 

▼ 백호(白湖) 임제(林悌) 묘 위치

 

▼ 백호(白湖) 임제(林悌) 묘 입구

 

▼ 백호(白湖) 임제(林悌) 선생 시비

 

▼ 백호(白湖) 임제(林悌) 묘를 오르는 가파른 계단

 

▼ 백호(白湖) 임제(林悌) 묘 측경

 

▼ 백호(白湖) 임제(林悌) 묘... 이런 곳은 돌형(突形)의 빙고혈(凴高穴)에 해당된다.

 

▼ 백호(白湖) 임제(林悌) 묘

 

▼ 백호(白湖) 임제(林悌) 묘 석물...

 

▼ 백호(白湖) 임제(林悌) 묘 석물

 

▼ 백호(白湖) 임제(林悌) 묘비...  좌측은 미수 허목선생이 찬한 묘갈의 원문과 번역본이 함께 새겨져 있다. 우측은 묘비...

 

▼ 백호(白湖) 임제(林悌) 묘비

 

▼ 백호(白湖) 임제(林悌) 묘갈... 임제의 외손자 미수 허목이 찬했다.

 

 

▼ 백호(白湖) 임제(林悌) 묘 후경...  앞쪽 안산이 없어 바람이 드나들고 물이 빠져 나가고 있어 재물에 영향이 크다.

 

 

 

▼ 백호(白湖) 임제(林悌) 묘 주산에 해당하는 신걸산과 현무정... 아래쪽이 과협으로 입수룡이 치고 올라오는 비룡입수이다.

 

▼ 백호산 산정에서 임제(林悌) 묘로 들어가는 입수룡

 

▼ 묘 전 명당에서 바라본 백호(白湖) 임제(林悌) 묘...

 

 

▼ 백호(白湖) 임제(林悌) 묘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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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