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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서역 터(延曙驛址)는 대로변에 위치해서 찾기는 쉬운 편인데 처음 방문할 때 승용차로 갔었는데 마땅히 주차할 곳이 없어서 인도에 세운 기억이 난다. 혹시 답사하실 분들은 이곳이 원룸텔이니까 주차가 가능할 것으로 보이니 미리 확인한 후에 주차를 해도 될 듯 싶다.

이곳은 다른 역(驛)과 마찬가지로 서울로 들어오거나 서울에서 나갈 때 이용하는 교통, 통신의 조직으로 관리들의 숙식, 말을 제공하던 곳이다. 서울에서 의주로 가는 첫번째 역이었기 때문에 중국 사신들이 올 때 마다 접대하던 곳이어서 그 중요성이 높던 곳이다.

이곳은 또한 인조반정 때 인조가 친병을 거느리고 가서 반군들을 맞이한 최초의 집결지로 알려져 있다. 인근에는 숙종 때 설치한 인조별서유기비가 남아있다. 답사할 때 같이 하면 좋을 듯 싶다.


 

 

▣ 영서역(迎曙驛)

 

역(驛)은 고대 이래 중앙 정부와 지방간의 효율적인 연결망을 구축하기 위해 육로(陸路)에 설치한 교통·통신 조직의 일종으로 역참(驛站)이라고도 하였다. 영서역(迎曙驛)은 고려 시대에는 청교도(靑郊道)의 역 가운데 양주[남경] 지역에 있으면서 파주·교하·개경 등지를 연결하였고, 조선 시대에는 양주 치소에서 서쪽 60리[24㎞] 지점[현재의 서울특별시 은평구 불광동 33-40번지 일대와 대조동 49-24번지 일대]에 있으면서 우도정역(右道程驛) 찰방 내지 영서도(迎曙道) 찰방 관할의 중심 역으로서 서울과 관서(關西) 지방을 연결하는 대로역(大路驛)이었다.

영서역은 다른 지역의 역들과 마찬가지로 국가가 지방 통치를 위한 정령(政令)의 전달 및 관리·군사 왕래의 임무뿐만 아니라 서울~의주의 사행로(使行路)에 위치한 까닭에 특히 외교 사행의 영송(迎送) 등의 임무가 원활히 수행되도록 하는 교통·통신 기구 역할을 하였다.

 

조선 시대 영서역(迎曙驛) 혹은 연서역(延曙驛) 은 한양에서 의주로 가는 서발(西撥)의 첫 번째 역이자 한양으로 들어오는 마지막 역이었다. 이 때문에 영서역은 중국 사신의 빈관(賓館)이나 왕의 행궁(行宮)으로 사용되기도 하여 조정에서는 국초부터 중시하였다. 1425년(세종 7)에는 외국 사신의 행차가 많은 경기·충청의 역원 정원을 늘려 주었는데, 특히 시신 행차가 빈번한 영서에서 개성의 산예까지의 각 역에는 예전 정원 8명에서 6명을 더 정하여 부담을 줄여 주었다.

1431년(세종 13)에는 찰방과 역리들의 사무와 부담을 덜기 위해 경기 정역찰방 한 명을 증원하고 그 관할 범위를 둘로 나누어, 영서역~산예역은 경기우도 정역찰방에, 양재역~무극역은 경기좌도·충청도 정역찰방에 속하게 하였다. 본래 영서역은 현재의 서울특별시 은평구 불광동 33-40번지 일대에 있었는데, 연산군 때 영서역이 서쪽 금표(禁標) 안에 들게 되어 역을 부평(富平)으로 옮겼다가 중종이 즉위한 후 대조동 49-24번지 일대에 다시 옮겨 지은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영서역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파괴되어 다시 지었는데, 이때 양주목사 윤경이 공사를 진행하면서 재목을 백성들 부담으로 지우거나 서까래 등을 사사로이 썼다 하여 파직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에 영서역은 주로 연서역으로 불리면서 관서[평안도] 직로의 두참이자 본역으로 기능하였다. 영서도의 중심 역인 영서역은 다른 지역의 역들과 마찬가지로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까지 존속하였다.

<디지털양주문화대전에서 인용>

 

 연서역 터(延曙驛址) 표석

 

 연서역 터(延曙驛址) 표석

 

 연서역 터(延曙驛址) 표석

 

 연서역 터(延曙驛址) 표석... 현재의 상황은 조금 바뀌었다.

 

 연서역 터(延曙驛址) 표석... 구산역에서 약200m 정도 된다.

 

 연서역 터(延曙驛址) 표석... 한영문 원룸텔 입구에 있다.

 

 연서역 터(延曙驛址) 표석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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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