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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오래전에 이태원 터 표석이 용산고 정문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는 조달본부가 그곳 인근에 있어서 그곳을 드나들며 눈에 들어와 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표석을 답사하면서 다시 찾아 사진을 찍고 포스팅을 하려다가 종로, 중구 표석을 먼저 하느라 미쳐 올리지 못한 표석이다.

조금 오래된 사진이어서 현재의 위치와 표석내용을 확인해 보았는데 예전과 변경된 것이 없어서 표석이 놓인 곳의 주변환경이 바뀌어 사진상으로는 변화가 있지만 또한번 방문을 생략하고 예전 사진으로 올리니 이해바란다. 지금은 용산고에서 표석 주위에 화초를 심고 조금은 삭막했던 분위기를 화사하게 꾸며 놓았다. 고마운 일이다.

이곳 이태원 터가 있던 곳은 지금의 이태원과는 많이 다른 곳이다. 이태원의 유래도 서너가지가 될 정도로 참 복잡한 곳이다. 말이 많아지고 변명이 많아질 때는 뭔가 말 못할 속사정이 있어서다. 드러내 놓고 말하지 못하는 상황까지 다 까발리며 어원을 찾겠다고 나서는 학자적 노력들이 나는 너무 매몰차게 느껴진다. 그냥 이런저런 사연들로 인해 이태원은 지금도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동네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것을... 



▣ 이태원 터(梨泰院址)


조선 초기 공무수행 관리자와 여행자가 머물던 숙소

이태원은 조선초기부터 공무수행 관리와 여행자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숙소로 설치된 ‘한양 4원(院)'중 하나로 도성 남쪽에 설치된 숙박시설이었다. 여기서 ‘원(院)’이란 고려시대 전성기를 맞은 주로 사찰들이 운영하는 노변 숙박시설을 가리킨다.

이태원은 남대문-이태원-서빙고-동작진-과천을 거쳐 남쪽지방에 이르는 길목이자 ‘영남대로’에서 서울로 진입하는 첫 원터이다. 이태원의 본래 위치는 오늘날의 이태원 거리와는 전혀 다른 현 용산중고등학교 자리였다. 

현재 ‘이태원(梨泰院)’이라는 명칭은 조선시대 효종 때 이 지역에 배밭이 많았는데 이를 명명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또 다른 설에 따르면 임진왜란때 왜군들이 이곳에 귀화하여 살았다는 점에서 어원으로 ‘이타인(異他人)’에서 출발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게 치욕을 당한 이 지역의 사찰 '운종사'의 여승들과 부녀자, 그리고 그들이 낳은 아이들을 위한 보육원을 지어 정착하게 했다고 해서‘이태원(異態園)이라 부르기도 하였다고 한다.

<문화콘텐츠닷컴에서 발췌>


▼ 이태원 터 표석


▼ 이태원 터 표석


▼ 이태원 터 표석


▼ 이태원 터 표석... 용산고 정문 앞에 있다. 지금은 표석 뒤쪽으로 작은 화단을 조성해 놓았다.


▼ 이태원 터 표석


▼ 이태원 터 표석... 이쪽 방향으로는 미군부대와 군사시설들이 있어서 사진 찍기가 조심스럽다.


▼ 용산고 교내...


▼ 이태원 터 표석 위치... 표석 뒤로 작은 화분을 조성해 놓은 것이 보인다.


▼ 이태원 터 표석


▼ 이태원 터 표석 위치... 전생서 터, 청파배다리 터 표석을 한 지도에 표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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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