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영성단 터(靈星壇址)는 한남동 유엔빌리지길 한남리버힐 정문 옆에 있다. 영성단은 조선시대 수많은 제사, 제단의 일종으로 종묘가 조상, 사직이 토지신에 제사를 지낸 반면에 영성단은 농사와 곡식의 별에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다. 조선초에 설치되었다가 중종 때 도교적 시설이 폐쇄될 때 같이 폐쇄되었다고 전한다. 이후 정조대왕은 《성단향의(星壇享儀)》(1797)를 펴내 제사를 복구하고자 했는데 책만 펴내고 제사는 지내지 못했다. 고종 때는 한남동에 있던 영성단을 선잠단 북쪽에 다시 세웠다고 한다. 지금 성북동 작은형제회 경내에는 성북구에서 설치한 영성단 터 표석이 세워져 있다. 

한남동에 있는 영성단 터는 전봇대에 가려져 잘 보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바람이 회오리 치는 곳이어서 항상 나뭇잎, 쓰레기 등이 쌓여 있다. 길 양쪽에서 모두 잘 보이는 곳으로 옮겼으면 한다. 


▣ 영성단(靈星壇)


새해 농사가 잘되도록 곡식을 맡은 별과 농사를 맡은 별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만든 제단.

우사(雩祀 : 기우제) 등을 지내는 단과 함께 서울의 남교(南郊)에 있었다고 하나 폐지된 지 오래되어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제사를 지내 온 기록이 있다. 문헌에 의하면 신라 때는 오성(五星)을 영묘사(靈廟寺) 남쪽에서 해마다 제를 지내 풍년을 기원한 일이 있으므로, 영묘사의 영과 오성의 성을 합해 뒤에 영성이라는 이름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한, 고구려에서는 큰 집을 서울의 좌측에 지어서 겨울에 영성제를 지냈다고 한다.

영성단의 설치는 고려 때 처음 시작돤 것이며, 조선에서도 고려의 유제(遺制)에 따라 한양 천도 후에 남교에 설치하고 입추 후에 진일(辰日)을 정일로 하여 제사를 지냈다. 또한, 태조가 발신(發身)한 함흥에 조선의 창립을 감사한다는 뜻에서 영성단을 설치하고 해마다 제관을 파견해 제사를 지냈다.

단의 규모는 정사각형이며 한 변의 길이가 6.3m(2장1척) 정도이고 단의 높이는 0.75m(2척5촌) 정도이다. 고려 시대에는 규모가 약간 커서 한 변의 길이가 3m 정도이고 높이가 0.9m 정도였다.

주위는 한 변이 15.6m(8보4척)이고 사면으로 담을 쌓아 출입을 통제하였다. 단의 남쪽에 요단(燎壇)이 있는데, 단에서 6m쯤 떨어져 있다. 한 변의 길이는 1.5m쯤 된다. 출입문은 단의 남쪽으로 나 있는데, 너비는 0.6m쯤 되며 위로 열고 드나들도록 되어 있다.

단 위에는 영성의 신좌와 용(龍)의 왼쪽 뿔이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 안치되어 있다. 용의 왼쪽 뿔은 하늘의 농지와 주곡(主穀)을 상징하는 것으로 지상에서도 풍년이 들도록 기원하는 뜻에서 숭배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성북구 선잠로 9-6(성북동 75-12)에 있었던 조선시대 별에 제사를 지냈던 제단이다. 영성단(靈星壇)은 성단(星壇)이라고도 불렀으며, 기우제를 지낼 때는 용단(龍壇)이라고 하였다. 새해 농사가 잘되도록 곡식을 맡은 별과 농사를 맡은 별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만든 제단으로 원래는 남대문 밖(현 한남동)에 만들었다고 하는데, 1865년(고종 2)에 혜화문 밖 선잠단의 북쪽에 다시 설치하였다가 1897년에 폐지하였다. 영성단이 있었던 위치에 현재는 작은형제회수도원이 자리하고 있는데, 마당에 영성단 표석이 세워져 있다.

<성북마을아카이브에서 인용>


▼ 영성단 터(靈星壇址) 표석



▼ 영성단 터(靈星壇址) 표석... 한남리버힐 정문 옆에 있다.



▼ 영성단 터(靈星壇址) 표석



▼ 영성단 터(靈星壇址) 표석



▼ 영성단 터(靈星壇址) 표석...전봇대에 가려져서 잘 안보인다.



▼ 영성단 터(靈星壇址) 표석



▼ 영성단 터(靈星壇址) 표석... 반대쪽 올라오는 쪽에서는 잘 안보여서 위에서 아래를 보고 찍었다.



▼ 영성단 터(靈星壇址) 표석 위치



▼ 한남동 일대 표석 위치



▼ 성북구청에서 작은형제회 경내에 세운 영성단 터(靈星壇址) 표석(고종 때 설치했던 곳)



▼ 성북구청에서 세운 영성단 터(靈星壇址) 표석




728x90
반응형
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