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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때 기와를 만들던 곳이 와서(瓦署)이다. 용산공고 앞에 와서 터가 있어서 일찍이 답사를 진행했었다. 그런데 용산구 표석을 올리지 못해 계속 미뤄왔었는데 이번에 올리면서 너무 오래된 자료라 위치나 내용이 변경되었나 싶어 로드뷰로 확인해 본 결과 그대로 있어서 그냥 올린다.

용산재개발로 인해 그곳에는 40층이 넘는 초고층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어 서울의 대표적 부촌이 되었다. 인근에서는 지금도 계속 재개발이 이뤄지고 있어서 하루가 다르게 변화되고 있다. 옛날 기와집은 부의 상징이었듯이 지금 이곳 또한 용산 부촌의 상징처럼 되고 있다. 뒤쪽으로 미군부대 토지가 반환 되면 이곳은 더욱 인기 택지로 될 듯 하다. 인근의 파크타워오피스텔  안에는 아주 오래된 노거수가 있다. 이 땅의 내력을 말해 주는 것 처럼 보인다.



와서(瓦署)


궁궐의 전각 지붕을 덮는 기와를 굽던 관립(官立) 기와 공장을 관장하던 관청.

조선초기에는 기와를 굽는 곳으로 동·서 와요(瓦窯)를 두었으나 성종 초에 『경국대전』 체제로 직제를 개편하면서 와서(瓦署)로 개편하였다. 이후 임진왜란이 끝난 후 궁궐을 재건하면서 기와의 수요가 증가하여 와서를 공조(工曹) 산하에 두었다. 조선후기 내내 왕이나 왕비의 국장 때 설치되었던 산릉도감의 분소(分所)로 번와소(燔瓦所)가 설치되면 와서의 별제(別提)가 파견되어 개와장(蓋瓦匠)이나 와장(瓦匠), 적눌장(積訥匠) 등을 감독하였다. 19세기에 들어 창덕궁 내 전각을 개건하거나 경복궁을 영건할 때 와서의 활동이 활발하였다. 1882년(고종 19)에 폐지되었다.

조선을 건국한 초기에는 송도에서 한양으로 천도한 이후 도성을 건설하기 위해 궁궐 전각 위 지붕을 덮는 기와를 구울 필요가 있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동·서 지역에 각각 동요(東窯)와 서요(西窯)를 두었다. 1414년(태종 15)에는 동·서요(東·西窯)가 처음으로 나타나는데 1460년(세조 6) 이후로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경국대전』 체제로 관서와 직제가 개편되면서 1469년(성종 1)부터는 와요가 와서로 개칭되었고 궁궐의 전각을 비롯한 관에서 공급하는 기와를 계속 관장하였다. 한편 백성들이 사용할 기와를 공급하기 위해 별와서(別瓦署)가 따로 설치하였다. 이 별와서는 별와요(別瓦窯), 별요(別窯)라고도 불렸다.

<위키실록사전에서 발췌>


▼ 와서 터 표석


▼ 와서 터 표석... 이곳은 용산공고 앞에 있다고 하는게 제일 찾기 좋다.


▼ 와서 터 표석


▼ 와서 터 표석... 용산시티파크 101동 앞 보도 화단에 있다.


▼ 와서 터 표석


▼ 와서 터 표석


▼ 와서 터 표석... 길건너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 와서 터 표석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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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