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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 2. 제 다음블로그에서 티스토리로 옮겨옵니다.>

 

도내동 은지 및 이축(李蓄)선생 묘

 

고양답사를 하면서 도내동 은지를 찾아갈 때는 해가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그런데 네비에 나온 주소는 인근까지 가서는 더이상 진행을 하지 못하고 멈추었다. 인근에서 사람을 찾아도 한 사람도 보이지 않고... 무작정 네비가 멈춘 근처 식당을 찾아가 물어봐도 아시는 분이 없었는데 다행이 한 분이 알려주시는데 바로 그 집 뒤에 연못이 있었다. 하지만 진입로가 없어서 빙 둘러서 가야만 했다. 해는 넘어가는데 여기서 시간을 지체하고... 또한 이축 선생 묘를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무작정 연못 근처 묘를 훑었는데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입구로 다시 나와 신도비를 보고 더듬어서 겨우 이축 선생 묘를 찾았을 때는 어두어진 뒤다. 좋은 카메라 덕분에 사진을 찍긴 했지만 아닌 것 같아 한 달 뒤 다시 찾았다.

덕분에 이축선생 부인 묘가 최근에 고양시향토문화재로 지정(향토문화제 제53호)되었는데 함께 답사할 수 있었다. 이곳에는 이축선생 묘, 이유청선생 묘(향토문화재 제54호), 이천서씨묘(이축선생 부인묘)를 함께 볼 수 있다.

 

이축(李蓄)
 
1402년(태종 2)∼1473년(성종 4).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윤보(潤甫). 이색(李穡)의 증손이며, 광주목사(光州牧使) 이숙야(李叔野)의 아들이다.
그가 처음 제수된 관직은 계성전직(啓聖殿直)이었는데, 그의 나이 16세 때였다.
그뒤 사선주부(司膳主簿)를 거쳐 외직으로 광주판관(廣州判官)을 지냈다. 사헌부의 감찰과 호조의 좌랑 및 정랑, 전농시(典農寺)의 소윤을 지냈으며, 사헌부장령·지사간원사·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봉상시사(奉常寺事)·첨지중추부사 겸 지병조사를 거쳐 이조참의에 올랐다.
1453년(단종 1)에는 황해도관찰사에 제수되었다. 그해 9월에 사직하고서 고양(高陽)으로 내려가 여생을 마쳤다.<한국학중앙연구원>


 원당읍(元堂邑) 도내 4리(道乃 4里)에 위치하며, 배(配) 이천서씨(李川徐氏)의 묘(墓)와 합부(合 )하였다.(오류-이천서씨묘는 인근에 별도로 있다) 봉분(封墳)는 둘레 24m 6 각묘(角墓)이다. 2 개의  비(碑)가 있는데 구비(舊碑)의 크기는 폭 45cm, 두께 13cm, 높이 100cm이며 신비(新碑)는 폭  42cm, 두께 20cm, 높이 112cm이다. 또 성종 6 년(1475)  2월 건립(建立)된 묘표(墓表)의 표문(表文)은 이승소(李承召)가 지었다. 
  이축(李蓄)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호(號)는 망월암(望越庵)이며  본관(本貫)은 한산(韓山)이다. 고려말 성리학자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증손자로 이숙야(李叔野)의 장남(長男)이다.<고양군지>

 

문화재지정 고양시 향토유적 제36호
문화재명칭 도내동 은지 및 이축선생 묘
소재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도내동 847-3 [연못: 도내동 846-6에서 50미터,은성교회앞에서 산길로접어듦, 묘:도내동 844-3(837-3주택뒷산)]
관리자(연락처) 한산이씨

 

도내동 은지 및 이축선생 묘
 
흥도동사무소에서 화전 방향으로 이어진 도로상의 은못이 마을 입구에 위치하며, 연못의 총 규모는 약 2500여 평이다. 은지의 서남쪽 200m 부근에 위치한 이축 선생묘는 이천서씨의 묘와 합부되어 있으며 조선조 전기의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묘소에는 묘비, 상석, 장명등, 문인석 1쌍이 갖추어져 있다. 

 이축(1402~1473)은 고려말의 대학자이었던 牧隱 李穡의 둘째 아들 인재 이종학의 손자로서 세종과 문종 때의 광주판관, 사헌부감찰, 호조좌정랑, 황해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은지는 이축선생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은거하면서 파 놓은 것으로 알려진 연못으로 1456년에 만들어졌으며 현재도 샘물에 의해 유지되어오고 있는 드문 연못이다.
<고양시 문화관광 사이트>

 

▼ 도내동 은지 근경... 찾아 들어가기가 상당히 어렵다..

▼ 도내동 은지 안내판

▼ 도내동 이축선생 묘역 일원

▼ 이축선생 신도비

▼ 이축의 조부이자 목은 이색의 둘째아들 이종학 신도비.. 이축신도비 옆에 있다.

▼ 이축선생 묘 전경... 해가 넘어가기 직전에 찾은 곳이라 캄캄하다

▼ 이축선생 묘표

▼ 이축선생 묘를 찾은때가 너무 어두워서 한달 뒤 다시 찾았다...

▼ 이축선생 묘비

▼ 이축선생 묘 석물

▼ 이축선생 묘 후경

 

이덕형(李德泂)

1566년(명종 21)∼1645년(인조 2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원백(遠伯), 호는 죽천(竹泉). 관찰사 이언호(李彦浩)의 증손으로, 호군 이오(李澳)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민원종(閔元宗)의 딸이다.1590년(선조 23)에 진사가 되고, 1596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이어 1597년에서 1608년까지 봉교·정언·지평·수찬·부교리·헌납·전적·문학·집의·교리·부응교·사간·사예·사섬시부정·응교·시강원보덕·사도시정(司䆃寺正) 등을 거쳤다.광해군 때에도 응교·동부승지·승지·대사간·좌부승지·부제학·이조참의·우승지·병조참판·도승지 등의 경관직(京官職)과 나주목사·전라감사·황해감사 등의 외관직을 지냈다.특히, 광해군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해치고 인목대비를 유폐시킬 때에 직접 반대의 입장에 서지 않고 왕의 뜻에 따르거나 아니면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였고, 광해군 말년에 도승지로 있을 때 어지러운 세태가 극도에 달하자 병을 이유로 사직하려고 소를 올렸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인조반정을 당하여 광해군을 죽이지 말 것을 주장하였으며 이를 본 능양군(綾陽君: 仁祖)이 그를 충신이라고 판단하여 반정후 인목대비를 맞이하는 의식에서 그를 앞세워 반정을 보고하였으며 능양군에게 어보(御寶)를 내리게 하는 데 공을 세웠다.인조 때는 한성부판윤이 되어 이괄(李适)의 난 진압에 공로가 있어 숭정(崇政)으로 승계하고, 주문사(奏聞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온 바 있다.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왕을 강화에 호종하고,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남한산성에 왕을 호종하였다. 환도 후 숭록(崇祿)으로 승계하여 예조판서·판의금부사·지돈령부사·우찬성 등을 지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죽창한화(竹窓閑話)》·《송도기이(松都記異)》 등이 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 이축선생의 5대손 이덕형 묘

▼ 이축선생의 5대손 이덕형 묘비

▼ 이덕형 묘 전경

▼ 이덕형 묘표

▼ 이축선생의 5대손 이덕형 묘를 한달 뒤 다시 찾아 촬영을 다시했다.

▼ 이덕형 묘표

▼ 이덕형 묘 후경

 

▼ 이축선생 묘 앞에는 이덕형의 아들 이광원 묘가 있다

▼ 이덕형의 아들 이광원 묘비

▼ 이광원 묘비 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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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