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2019. 2. 11. 제 다음블로그에서 티스토리로 옮겨옵니다.>

 

청양군(靑陽君) 심의겸(沈義謙)

 

심의겸은 명종비 인순왕후의 아우 즉 명종의 처남이다. 이런 곳에 왕가의 인척들을 쉽게 풀어 쓴다고 어떤 분이 지적질을 했던데 내 블로그에 쓰는 용어는 학문적인 것도 아니고 그냥 일반인들이 알아듣기 쉽게 쓰는 것이니 굳이 따지지 말아주시길 부탁 드린다. 왕의 사친을 쉽게 왕의 어머니라고 한다 해서 무식하다는 식으로 몰면 안될 것이다.

성균관이나 전주이씨종약원 등에서 쓰는 용어는 그대로 쓰고 일반인이 접하는 곳에서는 쉽게, 그것도 아주 쉽게 풀어서 써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꼭 학문께나 하신 분들은 전문 용어를 못써서 안달 난 사람들 같다. 나는 태생적으로 그런 분들 하고는 괘를 달리하니 이해 바란다. 이곳에서 사용하는 풍수 용어도 가능하면 많이 알려진 용어 외에는 풀어서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니 그 또한 이해 바란다.

심의겸과 김효원은 이조정랑 추천문제로 대립을 하다 결국 동인, 서인으로 당파의 발단이 되었다. 나는 그래서 왕의 외척이라 심의겸선생이 척신으로서 소위 끗발을 부린 것으로 알았는데 우암 송시열 선생이 쓴 비문을 읽어보니 오히려 심선생은 외척으로서 권력을 전혀 부리지도 않았고 이름 자에 들어있는 겸(謙)자 처럼 무척 자기관리를 잘 하신 것으로 나온다. 이는 심선생의 할아버지인 영의정 심연원의 뜻에 의해서 손자들의 이름자에 겸(謙)자를 넣었다고 비문에 되어있다. 

그렇지만 심의겸 선생은 김효원, 정인홍 등 동인들의 표적이 되어 여러 번 공격을 받은 것으로 봐서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타인의 마음을 얻는 데는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때나 지금이나 무난한 사람들이 출세가도를 달리는 것은 만고의 진리가 아닌가 싶다.

묘역에는 독립운동가 우산 심상각선생 묘도 있는데 심의겸선생 신도비 앞에 있는 집이 심상각선생 생가이다. 그곳에 후손이 살고 있다고 파주싱싱뉴스에 나온 것을 보았다. 묘역관리를 후손이 정성을 다하고 있겠지만 아침에 찾은 묘역은 손이 많이 가야할 듯 싶었다. 심의겸 묘비는 예전 것 그대로 이고, 배위 청주한씨 묘비는 새로 만들어 놓았다. 묘역 앞쪽에는 아들 청평군 심논의 묘가 있다.

 

청양군(靑陽君) 심의겸(沈義謙)
 
심의겸(沈義謙) 1535(중종 30)∼1587(선조 2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방숙(方叔), 호는 손암(巽菴)·간암(艮菴)·황재(黃齋). 사인(舍人) 심순문(沈順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 심연원(沈連源)이고, 아버지는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심강(沈鋼)이다. 어머니는 전주 이씨로, 증판서 이대(李薱)의 딸이다. 족부인 감찰 심홍(沈泓)에게 입양되었다. 명종의 비인 인순왕후(仁順王后)의 동생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5년(명종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562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청요직에 임명되었다. 1563년 사림들이 이량(李樑)으로부터 화를 입게 되자 외숙인 이량을 탄핵하며 권세와 간계를 배척하는 등 사림의 입장을 옹호하는 데 힘썼으나, 도리어 왕의 외척으로 일을 꾸민다는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1564년 지평(持平)·검상(檢詳)·사인(舍人)을 거쳐 이듬해 사간·부응교(副應敎)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 1566년 집의(執義)·군기시정(軍器寺正)·직제학·동부승지 등을 지냈다. 1569년 (선조 2) 좌부승지·대사간을 지내고, 1572년 이조참의 등을 지내는 동안 척신 출신으로서 사림들간에 명망이 높아 선배 사류들에게 촉망을 받았다.
이 때 김종직(金宗直) 계통의 신진세력인 김효원(金孝元)이 김계휘(金繼輝)에 의하여 이조정랑으로 천거되었다. 그러나 김효원이 일찍이 명종 때 권신이던 윤원형(尹元衡)의 집에 기거한 사실을 들어 권신에게 아부했다는 이유로 이를 반대하였다.
1574년 김효원은 결국 이조정랑에 발탁되었고, 1575년에는 아우 심충겸(沈忠謙)이 이조정랑에 추천되었다. 김효원이  전랑(銓郎)의 직분이 척신의 사유물이 될 수 없다 하여 반대하자, 두 사람은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구세력은 심의겸을 중심으로 서인(西人), 신진세력은 김효원을 중심으로 동인(東人)이라 하여 동서분당이 발생하였다. 김효원이 한성부의 동부에 산다 하여 그 무리들을 동인이라 하고, 심의겸이 서부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서인이라 하였다.
당시 정승 노수신(盧守愼)과 이이(李珥)가 사림간의 분규가 격화될 것을 우려하여 올린 소에 의해 개성유수로 나갔다가 전라감사를 거쳐, 조정으로 돌아왔다.
그 뒤 한때 낙향하여 은퇴했으나, 1580년 예조참판으로 함경감사를 역임하였다. 이 때 장령(掌令) 정인홍(鄭仁弘)이 심의겸을 질투하여 탄핵을 받았으나, 이이의 상소로 무사하여 전주부윤이 되었다.
1584년 이이가 죽자, 이발(李潑)·백유양(白惟讓) 등이 일을 꾸며 동인과 합세하여 공박함으로써 파직당하였다. 그러나 벼슬이 대사헌에 이르렀고, 세습으로 청양군(靑陽君)에 피봉되었다. 효성이 지극하고 검소하였으며, 외척으로 있으면서도 권세를 함부로 부리지 않았다. 나주의 월정서원(月井書院)에 제향되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문화재지정 미지정
문화재명칭 청양군(靑陽君) 심의겸(沈義謙) 묘
소재지 경기 파주시 광탄면 신산리 산 23-5(네비:광탄면 심궁로43번길 47 생가)
관리자(연락처) 청송심씨

 

 

청양군(靑陽君) 심의겸(沈義謙) 신도비... 앞쪽 나무를 모두 제거하여 환하게 드러내야 한다.

청양군(靑陽君) 심의겸(沈義謙) 신도비

청양군(靑陽君) 심의겸(沈義謙) 묘 가는 길...

청양군(靑陽君) 심의겸(沈義謙) 묘 전경

청양군(靑陽君) 심의겸(沈義謙) 묘... 왼편이 심의경 묘, 우측 신 묘비로 쓴 곳이 배위 청주한씨 묘

청양군(靑陽君) 심의겸(沈義謙) 묘 석물...

청양군(靑陽君) 심의겸(沈義謙) 묘표

청양군(靑陽君) 심의겸(沈義謙) 배위 청주한씨 묘표

청양군(靑陽君) 심의겸(沈義謙) 묘 백호쪽 석물... 

청양군(靑陽君) 심의겸(沈義謙) 묘 청룡쪽 석물... 아침 일찍 방문하여 햇살이 비추고 있다.

청양군(靑陽君) 심의겸(沈義謙) 묘 후경... 묘역이 어수선하고... 앞쪽으로 기운이 설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나무를 심었는데 그때문에 묘역이 양명하지 못하다.

 

청양군(靑陽君) 심의겸(沈義謙) 장남인 청평군(靑平君) 심논(沈惀) 묘

청평군(靑平君) 심논(沈惀) 묘표

청평군(靑平君) 심논(沈惀) 석물

청평군(靑平君) 심논(沈惀) 묘 후경

 

청양군(靑陽君) 심공(沈公) 신도비명


송시열(宋時烈) 찬 조선조 무오년(戊午年, 1498년 연산군 4년)부터 당화(黨禍)가 자주 이어진 것은 모두 소인으로 인해 군자를 공략한 것이었는데, 선조(宣祖) 때에 이르러서는 선비들 중에서 저절로 피차(彼此)로 나누어져 인물에는 득실(得失)이 있었고 화가 국가에 미치게 되었으니, 탄식함을 견딜 수 있겠는가? 심공(沈公)의 휘(諱)는 의겸(義謙)이고 자(字)는 방숙(方叔)인데, 그 초기에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이었을 때 영의정(領議政)인 윤원형(尹元衡)의 집으로 품의(稟議)할 일이 있어서 갔다가 마침 김효원(金孝元)의 침구가 그 집 사위의 방에 있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의심스럽게 여겼었는데, 김공(金公)이 과거에 급제하여 명성이 날로 성대해지자 공이 여러 번 청선(淸選)에 오르는 것을 막았고 뒤에는 김공이 또 여러 번 공의 허물을 지적하였지만 반드시 전일의 원한을 보복하는 데 뜻을 둔 것은 아니었다. 불행하게도 천박한 무리들이 말을 만들어서 일을 꾸미어 현저하게 분당(分黨)의 징조가 있었으므로, 율곡 이 선생[李栗谷]이 걱정이 되어 양쪽을 진정시키는 방도로써 지방으로 보내도록 청하여 공이 개성 유수(開城留守)가 되었다. 이로부터 수년 사이에 횡포하게 궤열(潰裂)하는 세력들이 날로 불어나고 달로 더해졌는데, 이때 정인홍(鄭仁弘)이 공을 가장 미워하다가 장령(掌令)이 되어서는 ‘공이 일찍이 친상(親喪)을 할 때에 기복(起復, 상중(喪中)에 출사(出仕)하는 것)을 꾀하였다’고 제창해 말하였다가 결과가 없게 되자 공을 탄핵하려 하므로 당시에 율곡이 대사헌(大司憲)으로서 타이르기를, “반드시 이런 이치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정인홍이 듣지 않았다. 율곡이 우계(牛溪, 성혼(成渾))에게 의론하기를, “내가 덕원(德遠, 정인홍(鄭仁弘))에게 따르지 않으면 반드시 화를 내어 떠날 것이고 시배(時輩)들은 이것을 잡고 나를 공격할 것이니, 나마저 떠나게 되면 이때의 일이 더욱 되지 않을 것이어서 형세로 보아 따라야 하겠다.”고 하였다. 덕원은 정인홍의 자(字)이다. 우계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덕원이 이같은 풍랑을 일으키는 것은 괴이할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율곡이 대략 계사(啓辭)의 초고를 구성하여 공을 파직시키자고 청하였는데, 주된 뜻은 공이 임금의 외척(外戚)에 처한 몸으로 오랫동안 사류(士類)의 마음을 잃었다는 것이었다. 율곡이 정인홍에게 이르기를, “이 계사는 매우 공정하니 한 글자도 가감(加減)해서는 안 된다.” 하자, 정인홍이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였는데, 이튿날 연이어 계청(啓請)하면서 ‘사류를 끌어들여 붙였다.’는 등의 말을 첨가하였으므로 임금이 ‘사류는 어떤 사람이냐?’고 묻자, 정인홍이 송강(宋江) 정철(鄭澈) 외의 여러 사람을 낱낱이 들어 대답하기를, “서로 더불어 조직을 체결하여 형세를 몰래 엿보았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율곡이 크게 놀라며 정인홍을 불러서 꾸짖기를, “어찌하여 그렇게 배신하는가?” 하니, 정인홍이 부끄러워하며 사례하고 피혐(避嫌)하자 체직되었다. 정인홍이 재차 계청했을 때 송강이 율곡을 보고 책망하며 말하기를, “어찌 우리들이 숙헌(叔獻, 율곡의 자(字))의 손에 죽을 줄 헤아렸으리요?” 하니, 율곡이 웃으면서 사례해 말하기를, “나는 일이 지연될 것이라고 보았는데, 사람들이 속이는 바를 당하게 되었네. 그렇지만 형(兄)이 나를 책망함은 또한 지나치지 않는가?” 하였다.을유년(乙酉年, 1585년 선조 18년)에 정인홍의 무리가 공을 공격하다가 여력을 떨어뜨리지 않고 공의 친구들에게까지 미치게 하니 한편의 사류(士類)들이 벗어나지 못했고 심지어 천부(天府)에 율곡과 우계 두 선생의 이름을 썼으니, 거의 원우(元祐) 때의 간당비1)(奸黨碑)와 같았다. 그러한 뒤에 사람들이 공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공을 공격한 자들의 사람됨을 알게 되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공이 거상(居喪)을 감당하지 못해 정해년(丁亥年, 1587년 선조 20년) 9월에 죽으니 향년 53세이고 묘는 파산(坡山) 시곡리(柴谷里)에 있다.심씨는 청송으로부터 세계(世系)가 시작되었는데, 고려조에 위위승(衛尉丞)인 휘(諱) 홍부(洪孚)라는 분이 있었고, 그 뒤 휘 덕부(德符)는 문하시중으로 청성백(靑城伯)이었는데, 이분의 아들 안효공(安孝公)은 심온(沈溫)을 낳았으니 조선조 때 소헌 왕후(昭憲王后)의 아버지이다. 2대를 지나 사인(舍人) 심순문(沈順門)은 연산군(燕山君) 때 유명했고 그의 아들 영의정 심연원(沈連源)은 시호가 충혜공(忠惠公)이고, 또 그의 아들은 청릉 부원군(靑陵府院君) 심강(沈鋼)인데 부인 이씨(李氏)이고 증(贈) 판서 이대(李薱)의 딸로서 무릇 열 자녀를 두었으니 인순 왕후(仁順王后)는 그 첫째이고 공은 셋째인데 족숙부인 감찰(監察) 심홍(沈泓)의 양자가 되었으며, 어머니는 청주 한씨(淸州韓氏)이다. 대개 심씨가 귀하게 드날려 여타 가문보다 특이했으므로 조부 충혜공이 성(盛)해서 넘치는 것을 두려워하여 여러 손자들의 이름에 ‘겸(謙)’ 자를 달았고 공도 또한 자호(自號)를 손암(巽庵)이라고 하였다.공은 문예(文藝)가 일찍 성취하여 나이 17세에 향시(鄕試)에 합격하고 21세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으며, 28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들어갔다가 주서(注書)와 설서(說書)를 지내고 예조 좌랑(禮曹佐郞)과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옥당으로 들어가서 부수찬(副修撰)에 지제교(知製敎)를 겸했고, 이조 좌랑 때 휴가를 주어 호당(湖堂)에 들어가 공부하게 하였다.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과 병조 좌랑(兵曹佐郞)ㆍ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ㆍ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ㆍ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ㆍ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ㆍ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ㆍ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ㆍ부응교(副應敎) 및 여러 사(司)의 정(正), 전한(典翰), 직제학(直提學) 등을 두루 겪었고, 통정 대부(通政大夫)로 올라 승정원 승지(承政院承旨)가 되었는데 이후부터는 이조ㆍ예조ㆍ병조ㆍ형조ㆍ공조의 참의(參議)를 두루 지내고 대사간(大司諫)과 판결사(判決事)를 거쳐 대사헌(大司憲)으로 특승한 다음 다시 공조ㆍ형조ㆍ예조의 참판(參判)과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과 개성 유수(開城留守)를 지냈으니, 이 때가 선조 을해년(乙亥年, 1575년 선조 8년)이었다. 2년이 지난 뒤에 전라 감사(全羅監司)로 나갔다가 임기가 만료되어 조정으로 돌아온 즉 이미 발붙일 곳이 없었으므로, 파산(坡山)에 있는 시골집으로 돌아가서 쉬었다. 경진년(庚辰年, 1580년 선조 13년)에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복귀하였다가 함경도 감사로 나갔는데, 오래 되지 않아 체직되어 한산(閑散)한 품계만 띠고 있다가 정인홍이 논의를 주장하여 양사(兩司)에서 함께 죄를 꾸며 얽어 넣기에 이르렀으며, 이듬해 임오년(壬午年, 1582년 선조 15년)에 전주 부윤으로 나갔는데, 이발(李潑)과 백유양(白惟讓) 등이 일을 꾸며서 공은 한때 훌륭했던 분들과 함께 법망(法網)에 걸려들었고 마침내 병들어 죽었다.공은 기질이 날카롭고 활달하며 용모가 우뚝하고 크며 자기 몸 다스림을 몹시 엄하게 하고 의리에 나아가기를 달려가듯 했으며, 효우(孝友)하고 공손하고 검소한 것은 천성에서 나왔다. 이러하였기 때문에 비록 임금의 외척(外戚)으로 남들이 혐의하고 핍박하는 처지에 놓였었지만 선비들은 존중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러나 임금의 외척을 공격하여 배척함이 이로부터 좋은 제목 거리가 되었으며, 또 선조(宣祖)가 공의 말을 누차 즐거워하지 않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강경한 자는 명성을 좋아하고 나약한 자는 비위를 맞추어 다투어가며 서로 하수(下手)하였던 것이고 공을 진짜 죄가 있는 것으로 삼은 것은 아니었다. 명종(明宗)ㆍ선조의 시기를 당하여 밝혀지지 않은 억울함을 깨끗이 씻어주었고 뛰어난 인재는 끌어 올려서 맑고 밝은 정치를 후세에서 따르지 못했으니, 다 공의 힘이다. 노 소재(盧蘇齋, 노수신(盧守愼))가 해상(海上)으로 귀양 갔다가 돌아와서 말하기를, “우리들이 서로 만나게 된 것은 다행이나 뒷 폐단이 있지 않겠는가?” 하였으니, 또한 공에게 무혐(無嫌)하다고는 할 수 없다. 선조 때에 와서 말하기를, “내가 주자학(朱子學)을 본받고자 이이(李珥)ㆍ성혼(成渾)의 당에 들어간다.”고 하였으며, “당시의 사람들이 또 양현(兩賢)을 공(公)의 당이라고 한 즉, 공의 당은 매우 빛나고 화려하여 따르는 사람들이 날로 불어날 것이다.” 하였다. 공이 곤궁했을 때를 당하여 탄식하며 말하기를, “나는 비록 백 번 곤욕을 치르더라도 주위의 어진 이들만 배척하지 않으면 죽어도 한될 바가 없다.” 하였으니, 역시 그의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하는 충성을 엿볼 수 있었다. 율곡이 관료들의 논의를 따라서 공을 논박한 것은 대개 분란을 진정시키고 파당(派黨)이 다른 이들을 안정시켜 화합하도록 함이었는데, 문원공(文元公) 김 선생(金先生, 김장생(金長生))은 매양 말하기를, “이 한 착상(着想)은 비록 한층 더한 정성스러운 마음에서 나왔겠으나 또한 그 어떻게 할 것을 알지 못하겠다.”고 하였다.대개 당초에 공과 김공(金公, 김효원(金孝元))의 한때의 다툼은 모두 깊은 뜻이 없었으나 종말에 가서는 물고기가 썩어 문드러지고 하수(河水)가 터져서 넘쳐흐르듯 되어 율곡과 우계가 모두 간당(奸黨)을 위하였다고 하였는데, 나랏일의 망극한 지경에까지 이르도록 함이 어찌 두 분의 본 마음이리요? 김공 또한 깊이 탄식하며 공에게 말하기를, “우리 두 사람이 비록 화란의 단계를 만들었으나 실상은 서로 마음을 아는 벗이 되었다.”고 하였으며, 그의 손자인 판서(判書) 김세렴(金世濂)은 공의 여러 손자들에게 말하기를, “남들은 우리 두 가문을 세수(世讎)라고들 하나 실은 세교(世交)이다.”라고 하였다.아! 나는 오히려 선배들의 풍류(風流)가 이와 같이 순후(淳厚)하였다고 언급하였지만, 그러나 김공은 난리 중 창황할 때 하찮은 일 때문에 청선(淸選)의 진출을 저지 당하였으니, 뒤에 일을 징계할 수 없음이 이와 같고, 오늘날에 와서 다시 삼분 오열(三分五裂)되어 국사가 더욱 어렵게 되었으니 이는 실로 공의 죄인이다.공의 부인 한씨(韓氏)는 경력(經歷) 한흥서(韓興緖)의 딸로, 2남 1녀를 두었으니 장남 심논(沈惀)은 청평군(靑平君)에 습봉(襲封)되고 차남 심엄(沈)은 현감(縣監)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딸은 참판인 윤훤(尹暄)에게 시집갔다. 청평군의 아들은 심익세(沈翼世)이고, 증 영의정의 아들은 응교(應敎)인 심광세(沈光世)와 현감인 심정세(沈挺世)와 청운군(靑雲君)인 심명세(沈命世)와 부사인 심장세(沈長世)와 심안세(沈安世)와 심필세(沈弼世)와 좌랑(佐郞)인 심희세(沈凞世)이고 네 딸은 유준(柳儁)ㆍ성여용(成汝容) 및 판서 이식(李植), 이승형(李承亨)에게 각각 시집갔다. 사위인 윤 참판의 아들은 판서인 윤순지(尹順之), 익찬(翊贊) 윤원지(尹元之), 지평(持平) 윤징지(尹澄之), 군수 윤의지(尹誼之)이다. 지금에 와서 5, 6대에 이르러 내외 자손을 다 기록할 수는 없고, 그 가운데 저명한 사람은 심진(沈榗)이 동지중추부사이고 심억(沈檍)과 심추(沈樞)가 첨지중추부사이며 심총(沈樬)이 부윤(府尹)이고 심권(沈權)이 한림(翰林)이고 심유(沈濡)가 응교(應敎)이다. 외손에는 수찬(修撰) 이면하(李冕夏), 판서 이단하(李端夏), 주서(注書) 신의화(申儀華), 평릉군(平陵君) 신범화(申範華), 교리 신계화(申啓華), 동지사(同知事) 성운한(成雲翰), 승지 이동명(李東溟), 성호징(成虎徵), 정랑 성호신(成虎臣), 부제학 이여(李畬) 등이 있다. 적통을 이은 이는 좌랑인 심징(沈澂)이다.4대손인 심약황(沈若潢)이 집안사람들의 뜻을 모아 나에게 와서 공의 명을 부탁하는데, 내가 후세에 태어나서 공의 세대를 상세히 알지 못하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일찍이 퇴계 선생이 칭찬하는 말을 하다가 서찰로 공에게 국사(國事)에 힘쓰라고 말하기를, “척신 가운데 훌륭한 사람이 있으니 국가의 복이다.”라고 하였으며, 율곡이 일찍이 임금께 아뢰기를, “심모(沈某)는 외척 중의 아름다운 자입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그의 사람됨이 선행을 좋아한다.” 하였다.공은 세도(世道)에 공적이 있고 군현(群賢)으로부터 어질다는 일컬음이 이와 같은데, 후배들에 이르러 입을 모아 공을 공격하면서도 감히 죄과를 드러내어 헐뜯지는 못하고 말하기를, “심모(沈某)는 실로 죄가 될 만한 것은 없으나 인척으로서 오래도록 권세를 잡은 것이 옳지 못하다.” 하였다. 이렇게 설명을 하면 공의 일에 대한 자초지종을 가히 알 것이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국운(國運)이 중간에 비색(丕塞)하여 조정의 의론이 한쪽 편으로 치우쳐서, 처음에는 물방울과 같이 시작되더니 끝내는 하늘에까지 넘치는 듯했는데, 남들은 공이 빌미가 되었다고들 말하였으나 공은 사양치 않았도다. 공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내가 실로 허물이 있었기에, 매우 심하게 나를 공격하다가 제현(諸賢)들에게까지 미치도록 하였고, 무슨 불평(不平)을 하여 나라가 마침내 병들게 하는가? 나는 삼가는 마음을 가진다고 하였으며 나는 근심스레 걱정한다고 하였네.”라고 하였다. 생각건대 공은 마음먹음이 공평한 것뿐이었고 나라를 위한 것뿐이었네. 남을 그르게 여기지 않았으며 나를 옳다고 하지 않으면서, 뒷걸음질쳐 물러나 기다리며 그들 마음대로 설치도록 내버려두었도다. 평소에 관대(寬大)하기를 편안하게 여겼으니 이것이 공의 위대한 국량(局量)이었도다. 대개 공의 초년에는 공적이 유도(儒道, 사림(士林))를 부호(扶護)한 것에 있는데, 이렇게 하다가 저지되었으니 의리가 당연히 더욱 드러났다네. 공이 혼란을 이롭게 여김이 아니었고 확실히 결단하기가 어려웠음이지. 왕국(王國)을 못 잊어 그리워하다가 끝내는 저패(沮敗)를 당하였도다. 진실로 그 마음을 추구(追究)해 본다면 죄 없는 것만도 다행하다고 할 수 있도다. (춘추 시대 조(趙)나라의 장군인) 염파(廉頗)와 상경(上卿)인 인상여(藺相如)처럼 처음에는 서로 어그러졌었지만 가구2)(賈寇)처럼 마침내 화평하게 되었네. 이는 이욕(利慾)으로 무너뜨리려는 것이 아니었는데 어찌 끝내 사사로이 다툴 것인가? 근원을 좇아 세밀히 따져본다면 공은 왕국(王國)의 기둥이었는데, 오직 속 좁은 간흉(姦凶)이 공을 세력으로 더욱 위급하게 강압하다가 마침내 큰 악인(惡人)이 되었으나 공의 명성은 더욱 우뚝하고, 공과 함께 배척을 당한 분은 도덕(道德)이 높은데 공은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았으나 이치는 자연스레 명분으로 모였다네. 먼 후대에는 옳고 그름이 정해질 것이니,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의 일을 추려서 묘도(墓道)에 세우는 비석에 새기노라. 
각주1) 간당비(奸黨碑) : 원우(元祐)는 송나라 철종(哲宗)의 연호로, 장돈(章惇)ㆍ채경(蔡京) 등이 당시의 여러 현인(賢人)들을 미워하여 마침내 간당비(奸黨碑)를 세웠던 일이 있었음.2) 가구(賈寇) :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 가복(賈復)과 구순(寇恂)으로, 구순이 영천 태수(穎川太守)였을 때 가복의 부장(部將) 중에 살인한 자가 있어 체포하여 옥(獄)에 가두었는데, 당시는 광무제의 초창기였으므로 군영(軍營)에서 범법(犯法)한 자가 있어도 대부분 서로 용서하였으나 구순이 옥에서 끌어내어 저자[市]에서 처형하자, 이에 가복이 수치스럽게 여기어 구순을 언젠가 복수하려 하였으므로, 구순이 그 계책을 알고서 만나지를 않았는데, 광무제가 구순의 겸억(謙抑)한 사실을 듣고서 집금오(執金吾)인 가복과 동석(同席)시켜 사투(私鬪)하지 말 것을 간곡히 당부하자, 드디어 서로 화해(和解)하여 우정을 맺고 돌아갔던 고사(故事)가 있음. 
靑陽君沈公神道碑銘 幷序 
本朝自弘治戊午。黨禍頻仍。皆以小人而攻君子。至于宣廟之世。則士流之中。自分彼此。人有得失。禍及國家。可勝歎哉。其始也。沈公諱義謙。字方叔。以舍人稟事於領相元衡。適見金公孝元寢具在其甥室。心有所疑。及金公登第。聲名日盛。公屢遏淸選。後金公又屢招公過。未必有意於修隙也。不幸浮薄之徒。造言生事。顯有分黨之漸。栗谷李先生憂之。建請兩出。以爲鎭定之計。公爲開城留守。自是數年之間。橫潰之勢。日增月益。時仁弘最嫉公。爲掌令。倡言公曾喪私親。圖起復而不果。欲劾公。時栗谷爲大憲。諭之曰。必無是理。仁弘不聽。栗谷議於牛溪曰。我不從德遠。則必怒而去。時輩必執此攻我。我去則時事益不可爲。勢須從之。德遠,仁弘字也。牛溪歎曰。德遠起此風浪。可怪也已。栗谷略構啓草。請罷公。主意以爲身居戚里。積失士類之心也。栗谷謂仁弘。此啓辭十分稱停。一字不可加減。仁弘唯唯。翌日連啓。添以援附士類等語。上問士類何人。仁弘歷擧鄭松江澈諸人以對曰。相與締結。窺覘形勢。栗谷大驚。招仁弘責之曰。何負也。仁弘媿謝避嫌而遞。當仁弘再啓也。松江字栗谷而責之曰。豈料吾輩死於叔獻之手乎。栗谷笑謝曰。吾見事遲。爲人所賣。然兄之責我。不亦過乎。乙酉。仁弘之徒。攻公不遺餘力。以及公之儕輩。而一番士類無有得脫者。至於栗谷,牛溪兩先生。並書名天府。殆如元祐之奸黨碑矣。然後人不惟知公。而亦知攻公者之爲人矣。未幾。公不勝喪而歿于丁亥九月。得年五十三。墓在坡山之柴谷里。沈氏出自靑松。麗氏朝有衛尉丞洪孚。其後德符。門下侍中靑城伯。是生安孝公溫。本朝昭憲王后之考也。歷二代。舍人順門。有名燕山朝。其子領議政連源。諡忠惠公。又其子靑陵府院君諱鋼。夫人李氏。贈判書薱之女。凡有十子。仁順王后第一。公其第三也。出後族父監察泓。妣淸州韓氏。蓋沈氏貴顯。異於他族。忠惠公懼盛滿。命諸孫名以謙。而公亦自號巽菴云。公文藝夙成。年十七發解。二十一進士。二十八。捷文科。由槐院。歷注書,說書,禮曹佐郞,司諫院正言。入玉堂爲副修撰。兼知製敎,吏曹佐郞。賜暇湖堂。成均典籍,兵曹正郞,司憲府持平,侍講院文學,弘文館校理,議政府檢詳,舍人,司憲府執義,司諫院司諫,副應敎,應敎,諸司正,典翰,直提學。陞通政爲承政院承旨。自後周流吏禮兵刑工參議,大司諫判決事。特陞大司憲。則又歷工刑禮參判,漢城府右尹。及爲開城留守。則宣廟乙亥歲也。越二年。移拜全羅監司。瓜遞還朝。則已無容足地。而歸臥坡山村舍。庚辰。以禮曹參判。復出爲咸鏡監司。未幾辭遞。帶散階。仁弘主論。至於兩司論罷。翌年壬午。拜全州府尹。李潑,白惟讓等用事。公與一時群賢。同罹文網。而公卒焉。公氣岸豁達。容貌魁偉。律己甚嚴。趨義如奔。孝友恭儉。出於天性。以故雖居戚畹嫌逼之地。而士流無不推重。然攻斥戚畹。自是好題目。而又宣廟屢有不悅公之語。故強者喜名。懦者承意。爭相下手。非以公爲眞有罪也。當明,宣之際。洗滌幽枉。登崇俊良。淸明之治。後世莫及。皆公之力也。盧蘇齋自海上出來曰。吾儕遭逢雖幸。無乃有後弊乎。亦不能無嫌於公也。及乎宣廟有曰。吾欲法朱子。入珥,渾之黨。而時人又以兩賢爲公之黨。則公之黨甚有光華。而從之者日衆矣。當公之困殢也。公歎曰。我則雖百端困辱。而他餘諸賢不爲擯斥。則死無所恨矣。亦可見忘己爲國之忠矣。栗谷之隨僚議駁公。蓋欲鎭定紛拏。保合異同。而文元公金先生每言此一著。雖出於一段誠心。亦未知其何如也。蓋當初公與金公一時之爭。皆無深意。而至於末流。魚爛河決。栗谷,牛溪皆爲姦黨。而國事至於罔極者。豈二公之心哉。金公亦深歎之謂公曰。吾二人者。雖爲亂階。而實相爲知己。至其孫金判書世濂謂公諸孫曰。人謂吾兩家爲世讎。而實則世交也。嗚呼。吾猶及前輩風流其淳厚如此。然而金公以亂離中蒼黃微事。阻於淸選。後之不能懲前也如此。至於今日。則又三分四裂。國事愈不可爲。此實公之罪人也。夫人韓氏。經歷興緖之女。長男惀。襲封靑平君。次㤿縣監。贈領議政。女適參判尹暄。靑平男翼世。議政男應敎光世,縣監挺世,靑雲君命世,府使長世,安世,弼世,佐郞煕世。四女適柳儁,成汝容,判書李植,李承亨。尹參判男判書順之,翊贊元之,持平澄之,郡守誼之。今至五六世。內外子孫。不可殫記。其顯者榗爲同樞。檍,樞爲僉樞。樬爲府尹。權爲翰林。濡爲應敎。外裔修撰李冕夏,判書李端夏,注書申儀華,平陵君申範華,校理申啓華,同知成雲翰,承旨李東溟,承旨成虎徵,正郞成虎臣,副提學李畬。而承嫡統者。曰佐郞澂也。四代孫若潢。以諸宗人之意。來請公銘。余生也後。不得詳公之世矣。竊嘗見退溪先生嘗有稱道之語。而以書勉公以國事曰。戚里有賢。國家之福也。栗谷嘗白上曰。某外戚之佳者。又曰。其爲人也好善。公之有功於世道。而爲群賢所賢如此。至於後輩雖交口攻公。亦未敢顯斥罪過而曰。沈某固無可罪。以戚畹久執權柄爲不可云。以此論之。則公之始卒。可知矣。銘曰。
國運中否。朝論陂偏。初如涓滴。終乃滔天。謂公爲祟。公不辭焉。公歎曰余。實有尤愆。攻我太甚。以及諸賢。云胡不平。俾國卒瘨。我心慺慺。我憂悁悁。惟公秉心。公耳國耳。不人爲非。不我爲是。逡巡退聽。任其拳踢。安素坦焉。是公偉量。蓋公初年。功在扶陽。如是而止。義當益章。匪公利昏。而難夬夬。眷戀王國。卒以取敗。苟原其心。可幸無罪。廉藺初乖。賈寇終平。始非利壞。卒豈私爭。循源究委。王國之楨。惟是陜姦。持公益急。終爲大憝。公名尤立。同公受擯。道德之尊。公雖泯默。理自聚分。百世之後。是非乃定。我撮始終。鐫于樹徑。<인터넷자료,세종대왕기념사업회서 인용>

 

정보가 유익했나요? 도움이 되었다면 공감, 댓글, 광고 등에 터치 한번 부탁해요...

728x90
반응형
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