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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3. 19. 제 다음블로그에서 티스토리로 옮겨옵니다.>

 

영의정 문익공 김수흥 묘

 

영의정 김수항 묘는 쉽게 찾았는데 김수흥 묘를 찾기위해 먼저 다녀오신 분들의 답사기를 검색하여 찾아나섰으나, 지도를 참고해서 찾아보니 부근에 눈에 보이는데 막상 찾으려고 하였더니 진입로가 잘 보이지 않는다.

무조건 산으로 들어가서 방향을 잡으려고 했는데 길이 없어서 가시덤불을 헤쳐가며 들어갔다. 이럴때 제일 중요한게 방향타를 잡는건데 김수흥선생 묘는 인근의 철탑을 기점으로 삼으면 좋다. 철탑을 보고 그 오른쪽으로 진입하였더니 넓은 묘역이 나온다. 겨울에도 이렇게 찾아들어가기가 힘드는데 여름철에는 안내자 없이 찾기란 보통일이 아닐듯 싶다. 

 

김수흥(金壽興)
 
1626년(인조 4)∼1690년(숙종 16).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기지(起之), 호는 퇴우당(退憂堂) 또는 동곽산인(東郭散人).
생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광찬(金光燦), 양부는 동부승지(同副承旨) 김광혁(金光爀)이고, 양모는 광산김씨로 동지중추부사 김존경(金存敬)의 딸이며,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형이다.
1648년(인조 26)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655년(효종 6)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병과로 급제하고 이듬해 문과중시에 역시 병과로 급제한 뒤 부교리‧대사간‧도승지 등을 역임하고, 1666년(현종 7)에 호조판서, 1673년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가 되고 이듬해 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문제(服制問題)로 남인에게 몰려 부처될뻔 하였고, 그해 8월 현종이 죽자 양사(兩司)의 탄핵으로 춘천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와 양주로 물러가 살았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어 다시 영의정에 올랐으나,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다시 집권하자 장기(長鬐)에 유배되어 이듬해 배소에서 죽었다.
그는 송시열(宋時烈)을 마음의 스승으로 존경하여 그의 뜻에 따랐고, 《주자대전(朱子大全)》‧《어류(語類)》 등을 탐독하였다. 역대의 왕에게 시폐소(時弊疏)를 올려 백성의 편에서 정치하기를 힘쓰고 정치의 혁신을 여러 번 건의했다.
저서로는 《퇴우당집》 5책이 전해지고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

 

문화재지정 미지정
문화재명칭 영의정 문익공 김수흥 묘
소재지 경기도 남양주시 이패동 산11번지
관리자(연락처) 안동김씨

   

▼ 영의정 김수흥 묘..

▼ 영의정 김수흥 묘비

▼ 영의정 김수흥 묘비 측후면

▼ 영의정 김수흥 묘 청룡자락 석물..

▼ 영의정 김수흥 묘 백호자락 석물.. 뒷쪽에 보이는 철탑이 묘를 찾는 방향타이다..

▼ 영의정 김수흥 묘 입수도두...

▼ 입수도두 뒤로 나즈막하니 용이 보이는둥 마는둥 내려온다...

▼ 영의정 김수흥 묘 후경

▼ 청룡쪽 후경

▼ 백호쪽 후경

▼ 영의정 김수흥 묘는 묘역은 넓게 되어있는데 석물은 아주 단촐하다. 

▼ 영의정 김수흥 묘 앞쪽에 석물이 보이는데... 아마도 신도비일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비신은 안보이고 비좌만 낙엽에 파뭍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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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