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가지산(迦智山) 석남사(石南寺)

 

울산에 다녀오면서 시간이 조금 있어서 문수사를 들러보고 바로 석남사를 찾았다. 석남사는 입구에서부터 오래된 소나무가 즐비한 것을 보니 천년고찰이라는 말이 사실로 다가온다. 계곡이 깊은지 계곡물이 가뭄에도 상당히 많이 흐른다.

이곳 숲은 일제강점기 때 송진을 채취한 흔적이 아직도 상처로 남아서 보기 흉하게 변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소나무들이 치유되는 과정에서 뒤틀리고 때로는 옆 나무와 붙어서 연리지로 된 것도 있다. 아픈 기억을 간직한 숲은 지금은 치유되어 아주 상큼한 공기를 뿜어주고 이곳 사찰을 찾는 사람들에게 좋은 기운을 보내주고 있다.

계곡을 따라 오르다 절간으로 들어가려는데 계곡에 송태관이라는 한자가 눈에 들어온다. 처음에는 이곳이 풍류를 읊던 곳으로 각자(刻字)를 새겨 놓은 것으로 알았는데 알고보니 흔히 하는 개인의 이름을 새긴 것이었다. 고종 때 매국노들을 피해 고종을 도운 마지막 비서관이라고 한다. 다행히 배반자가 아니었으니 지금까지 남아있었으리라. 그의 아들 호가 석남인 것도 이곳 석남사와 인연이 깊은 집안인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곳 석남사에는 창건주 도의국사의 것으로 알려진 승탑이 보물로 지정 되어있다. 요즘은 보물에 번호부여를 하지 않아서 문화재청에서 인용을 해도 보물 번호가 없다. 오래 전에 보존된 기록으로 보물 369호라고 표기한다.

석남사는 석남사계곡에서 흘러오는 물줄기와 상운산 쪽에서 흘러오는 물줄기가 만나는 합수처 안쪽에 기운이 뭉쳐진 곳에 위치한다. 우리나라의 대다수 사찰들의 입지를 보면 두 물 또는 세 물이 서로 만나는 곳에 대부분 입지하고 있다. 이곳도 예외는 아니어서 용이 끝나는 용진처에 앉아있다. 

해발 1000m가 넘는 가지산의 끝자락에 절을 세울 생각을 처음에 한 분들은 풍수지리의 대가들이 틀림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절은 임진왜란, 한국동란을 거치면서 폐허가 되었다. 왜 그랬을까? 큰 산중에 입지하는 사찰들은 항상 화기(火氣)를 두려워해야 한다. 화기를 누를 수 있는 비보를 여러번 언급했는데 즉 해인사, 통도사의 예를 잘 따라서 비보를 해야 한다.

 

 

가지산(迦智山) 석남사(石南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의 말사이다. 이 절은 824년(헌덕왕 16) 우리 나라에 최초로 선(禪)을 도입한 도의(道義)가 호국기도도량으로 창건한 선찰(禪刹)이다.
창건 당시 화관보탑(華觀寶塔)의 빼어남과 각로자탑(覺路慈塔)의 아름다움이 영남 제일이라고 하여 석남사(碩南寺)라 하였다고 하며, 일설에는 가지산의 별명이 석안산(碩眼山)이기 때문에 석안사라고 하였다고도 한다.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뒤 1674년(현종 15)에 언양현감 강옹(姜甕)의 시주로 탁령(卓靈)·자운(慈雲)·의철(義哲)·태주(泰珠)가 중창하였고, 진혜(振慧)·쌍원(雙遠)·익의(益儀)·성진(性眞)이 단청을 하였으며, 동시에 종과 북 등의 불구(佛具)를 마련하였다. 이어 정우(淨佑)·각일(覺日)·석맹(碩孟) 등이 극락전·청풍당·청운당·청화당·향각(香閣)을 증축하였고, 희철(熙哲)이 명부전을 세웠다.
1803년(순조 3)에는 침허(枕虛)와 수일(守一)이 중수하였고, 1912년에는 우운(友雲)이 중수하였다. 그러나 6·25전쟁 이후에 크게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57년 비구니 인홍(仁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크게 증축하였다. 이 때부터 비구니 수도처로서 각광을 받은 이 절에는 항상 100명이 넘는 비구니들이 엄격한 계율을 준수하면서 수도에 정진하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하여 극락전·설선당(說禪堂)·조사전(祖師殿)·심검당(尋劍堂)·침계루(枕溪樓)·정애루(正愛樓)·종루(鐘樓)·무진료(無盡寮)·대방(大房) 등 30여 동이 있다.
이들 가운데 극락전은 1791년(정조 15)에 세운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문화재로는 도의국사의 사리탑으로 전해지는 보물 제369호의 울주 석남사 승탑 (蔚州 石南寺 僧塔)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2호인 삼층석탑, 조선 초기에 제작된 엄나무구유와 돌구유 등이 있다.
삼층석탑은 824년에 도의가 호국의 염원 아래 15층으로 세운 것이라 하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방치되어 오다가 1973년 스리랑카의 승려가 사리 1과를 봉안하면서 3층으로 개축한 것이다. 이 밖에도 절 입구에 4기의 부도가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통도사의 말사<보물 제369호>
문화재명칭 가지산(迦智山) 석남사(石南寺)<울주 석남사 승탑>
소재지 울산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 1064(주차:덕현리 998-8)
관리자(연락처) 가지산(迦智山) 석남사(石南寺)

 

 

 

일주문 부근

 

 

▼ 가지산(迦智山) 석남사(石南寺) 입석 및 사적비

▼ 가지산(迦智山) 석남사(石南寺) 일주문...

▼ 가지산(迦智山) 석남사(石南寺) 일주문 뒤쪽.... 장엄적멸도량(莊嚴寂滅道場)이라 적혀있다.

▼ 가지산(迦智山) 석남사(石南寺) 숲... 일제 때 이곳 소나무 송진을 채취한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 가지산(迦智山) 석남사(石南寺) 부도군

▼ 가지산(迦智山) 석남사(石南寺) 안내도

▼ 가지산(迦智山) 석남사(石南寺) 계곡... 계곡 안쪽에 가람이 자리 잡았다.

▼ 가지산(迦智山) 석남사(石南寺) 계곡의 송태관이라는 각자... 나는 이곳에서 풍류를 읊은 자리로 각자를 새겨 놓은 줄 알았는데... 흔히 보이는 사람 이름을 새겨 놓은 곳이다. 송태관(宋台觀)은 고종황제의 마지막 비서관(宮內府侍從院副卿)으로 요즘으로 말하면 비밀경호원겸 수석비서관이었고, 그의 아들 石南 송석하는 최초 민속학자로 민속문화의 보존보급과 학술단체 기여 등 문화운동가였다. 한미문화협회장ㆍ서울대학교 교수ㆍ민족박물관장 등을 지냈으나 1948년 36살 젊은 나이에 생애를 마친다.<출처:양산신문>

▼ 가지산(迦智山) 석남사(石南寺) 계곡

▼ 가지산(迦智山) 석남사(石南寺) 계곡쪽에 있는 정수원...

 

 

 

대웅전 부근

 

 

▼ 가지산(迦智山) 석남사(石南寺) 계곡을 건너면 대웅전으로 진입할 수 있다. 앞에 보이는 건물은 종루...

▼ 가지산(迦智山) 석남사(石南寺) 침계루 아래를 통과하면 석탑과 대웅전을 마주한다.

▼ 석남사(石南寺) 삼층석가사리탑.... 신라 헌덕왕 16년(1200여년전)에 도의국사가 호국의 염원을 빌기 위하여 세운 15층의 대탑으로 임진왜란 때 손실된 것을 1973년에 삼층탑으로 복원하고 스리랑카 사타티싸 스님이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셔다가 석남사 삼층석가탑 안에 봉안했다.

▼ 석남사(石南寺) 침계루...

▼ 석남사(石南寺) 전경

▼ 석남사(石南寺) 대웅전

▼ 석남사(石南寺) 강선당...

▼ 석남사(石南寺) 서래각... 종무소로 쓰고 있다.

 

 

 

극락전 외 기타 가람 건물

 

 

▼ 석남사(石南寺) 수조

▼ 석남사(石南寺) 종루

▼ 석남사(石南寺) 삼층석탑(울산 유형문화재 제5호)... 이 석탑은 이중의 기단위에 세운 삼층석탑으로 원래는 대웅전 앞에 있었는데 1973년에 현재 위치로 옮겨 졌다. 높이 2.5m로 규모는 작으나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 양식을 따르고 있다. 탑 모서리의 각을 줄여 둥글게 조각하였으며 상륜부는 보수 되었는데 노반석, 앙화, 보륜, 보개 등을 갖추고 있다.<현지 안내문 옮겨적다.>

▼ 석남사(石南寺) 극락전... 현판은 탄허스님의 글씨다.

▼ 석남사(石南寺) 조사전

▼ 석남사(石南寺)는 계곡의 두 물이 합수 되는 지점에 위치하여 기운이 뭉쳐진 곳이다. 대다수의 절간들이 이처럼 두 물이 합쳐지거나 태극으로 모여드는 곳에 입지를 하고 있다. 

 

 

 

석남사 승탑 주변

 

 

▼ 울주 석남사 승탑 (蔚州 石南寺 僧塔).... 보물 제369호

 

반응형

 

울주 석남사 승탑 (蔚州 石南寺 僧塔)
 
석남사 동북쪽 언덕의 넓은 대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일찍부터 석남사를 세운 도의국사의 사리탑으로 불려왔다. 전체적으로 8각의 형태을 취하고 있으며, 8각의 바닥돌 위에 기단부(基壇部)와 탑신(塔身)을 놓은 모습이다.
 기단부의 아래받침돌은 8각으로 사자와 구름을 도드라지게 새겨 놓았다. 북모양을 하고 있는 가운데받침돌에는 상·하·좌·우에서 안쪽을 향하여 낮게 솟은 꽃모양의 안상(眼象)을 새겼고, 그 안으로 꽃모양의 띠를 둘렀다. 윗받침돌은 연꽃을 새겨 탑신을 받치도록 하였다. 탑신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얇게 새겼고, 앞·뒷면에는 문짝 모양의 조각을 두었는데, 그 중 앞면에만 자물쇠가 새겨져 있다. 문의 양 옆으로 신장입상(神將立像)이 배치되어 있다. 지붕돌은 추녀가 짧고 서까래와 기왓골이 상세히 표현되었으며, 지붕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이 차례대로 얹혀져 있다.
 전체적으로 넓이에 비하여 높이가 높은 부재로 구성되어 길쭉해 보이며, 바닥돌의 폭이 좁아 안정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래받침돌의 구름무늬나 탑신의 신장상이 형식적으로 표현되었고, 특히 가운데받침돌의 안상조각에서 시대가 내려옴을 볼 수 있으나 각 부분이 완전히 보존된 아름다운 작품이다.
 1962년 해체, 수리할 당시 기단부의 가운데받침돌에서 사리장치를 두었던 공간이 확인되었으나 사리장치는 남은 것이 없었다.<문화재청에서 인용>

 

▼ 울주 석남사 승탑 (蔚州 石南寺 僧塔)

▼ 울주 석남사 승탑 (蔚州 石南寺 僧塔) 

▼ 울주 석남사 승탑 가는 길... 오랜만에 채송화를 봤다.

▼ 울주 석남사 승탑에서 바라본 석남사 전경....

 

728x90
반응형
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