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팔공산(八公山) 은해사(銀海寺)

 

조계종 교구 25본사 중 못가본 곳이 은해사(銀海寺) 한 곳이었는데, 작년 코로나로 인해 답사가 중지된 때 혼자서 경북 일원  선현묘지 답사를 진행하면서 은해사를 다녀왔다. 답사기를 쓰려고 보니 몇 장의 사진이 부족해서 이번 여름에 한번 더 다녀왔다. 그러다보니 사진이 초가을 사진과 여름 사진이 혼재되어 있음을 미리 양해 구한다.

불, 보살, 나한 등이 중중무진으로 계신 것처럼 웅장한 모습이 마치 은빛 바다가 춤추는 극락정토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 은해사이다. 또 은해사 주변에 안개가 끼고 구름이 피어 날 때면 그 광경이 은빛 바다가 물결치는 듯 하다고 해서 은해사라고도 한다. 
신라의 진표율사는 '한 길 은색 세계가 마치 바다처럼 겹겹이 펼쳐져 있다. (一道銀色世界 如海重重)'라고 표현한 바 있다. 은해사는 현재 말사 39개소, 포교당 5개소, 부속암자 8개소를 관장하고 있는 대본사이다.

은해사는 조선 31본산, 경북 5대 본산,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의 자리를 지키는 경북지방의 대표적 사찰이다. 그리고 교구 본사중 본존불로 아미타불을 모시는 미타도량으로도 유명하다. 
신라 41대 헌덕왕 1년(809년) 혜철국사가 해안평에 창건한 사찰이 해안사인데 이 해안사로부터 은해사의 역사가 시작된다. 현존하는 암자만도 여덟 개가 있고 말사 숫자가 50여 개에 이르고 한국 불교의 강백들을 양성, 교육하는 "종립 은해사 승가대학원"이 있는 사찰이기도 하다.<은해사 홈페이지에서 인용>

 

 

은해사(銀海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이다. 809년(헌덕왕 1)에 혜철국사(惠哲國師)가 해안평(海眼坪)에 창건한 사찰로, 처음에는 해안사(海眼寺)라고 하였다.

그 뒤 1270년(원종 11)에 홍진국사(弘眞國師)가 중창하였고, 1275년(충렬왕 1)에는 원참(元旵)이 중건하였으며, 1485년(성종 16)에는 죽청(竹淸)과 의찬(義贊)이 묘봉암(妙峰庵)을 중창하였다. 1543년(중종 38)에는 보주(寶珠) 등이 중수하였으며, 1545년(인종 1)에는 천교(天敎)가 지금의 장소로 법당을 옮겨 새로 절을 지었다. 그때 법당과 비석을 건립하여 인종의 태실(胎室)을 봉하고 은해사라고 하였다.

1563년 묘진(妙眞)이 중건하였고, 1589년(선조 22)에는 법영(法英)이 법당의 사방에 새로 건물을 세우고 단청하였다. 1651년(효종 2)에는 백흥암(百興庵)과 명부전(冥府殿)을 신축하였으며, 1667년(현종 8)에는 백흥암과 명부전을 중수하였다. 1712년(숙종 38)에는 은해사를 종친부(宗親府)에 귀속시켰고, 1714년에는 절 문 일대의 땅을 매입하여 소나무를 심었으며, 1730년(영조 6)에는 백흥암의 보화루(寶華樓)를 중건하였다.<중략>

1847년(헌종 13)에는 은해사 창건 이래 가장 큰 불이 나서 1,000여 칸의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다.
같은 해 팔봉(八峰) 등이 주관하여 사방 아홉 칸의 법당과 향실(香室), 심검당(尋劍堂)·설현당(說玄堂)·청풍료(淸風寮) 등을 새로 지었다. 또 이듬해에 옹호문(擁護門)·안양전(安養殿)·동별실(東別室)·만월당(滿月堂)·향적각(香積閣) 등을 세웠으며, 1849∼1850년에 걸쳐서 보화루를 중수하였다. 1849년에는 백흥암의 중료(衆寮)를 중창하였고, 1858년(철종 9)에는 청봉(靑峰) 등이 백흥암의 영산전을 중수하였으며, 1860년에는 운부암(雲浮庵)이 소실되었다.<중략>

현재 이 절은 말사 39개 소, 포교당 5개 소, 부속암자 8개 소를 관장하고 있는 대본사이다. 1943년까지만 해도 이 절은 논 46만4000여 평, 밭 2만8000여 평, 임야 920정보를 가지고 있었고, 2,484평에 세워진 건물은 35동 245칸에 이르렀다. 이 절은 동화사(桐華寺)와 더불어 팔공산의 대표적인 사찰로 지눌(知訥)이 거조암에서 신행결사(信行結社)를 도모한 이래 주목을 받게 되었다.

특히, 홍진국사가 머문 뒤에는 선교양종(禪敎兩宗)의 총본산으로서 사격(寺格)이 고양되었고, 조선 후기의 고승 영파(影坡)가 이곳을 중창한 뒤로는 화엄교학(華嚴敎學)의 본산으로서 그 명성을 드날렸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지장전·산령각(山靈閣)·설선당·심검당·단서각·종루·보화루·승당·요사채·객실 등이 있으며, 그 밖에 1999년 성보박물관이 완공되었다. 대웅전과 보화루의 현판은 추사(秋史)의 글씨라고 전해지며, 대웅전 안에 봉안되어 있던 극락구품회탱(極樂九品會幀)은 1750년에 성청(性淸)과 옥련(玉蓮)이 그린 뛰어난 작품이나 수년 전의 도난사건 이후 따로 보관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절과 부속 암자에는 국보 1점, 보물 5점의 문화재와 기타 60여 점의 사중 보물, 24동의 건물이 있다. 지정문화재로는 중국식 건축양식을 본뜬 국보 제14호의 영천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보물 제486호인 영천 은해사 백흥암 수미단(須彌壇), 보물 제514호인 영천 은해사 운부암 금동보살좌상, 보물 제1270호 은해사괘불탱, 보물 제1604호 영천 은해사 청동북 및 북걸이 등이 있고, 산내 암자로는 운부암·거조암·기기암·백흥암·묘봉암·중암암·백련암·서운암 등이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 내용 수정함>

 

문화재지정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
문화재명칭 은해사(銀海寺)
소재지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 479
관리자(연락처)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 은해사(銀海寺)

 

▼ 팔공산(八公山) 은해사(銀海寺)

▼ 팔공산(八公山) 은해사(銀海寺)

▼ 팔공산(八公山) 은해사(銀海寺).... 일주문 겸하면서 내부에는 사천왕상이 있다.

▼ 팔공산(八公山) 은해사(銀海寺) 소나무 숲... 기록에 의하면 1714년에 사찰 입구 일대의 땅을 매입하여 소나무를 심었는데 지금의 은해사 앞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그때에 심어진 것으로, 300년 가까운 세월동안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소나무들이라고 전해진다.

▼ 은해사(銀海寺) 연리지 사랑나무...

▼ 팔공산(八公山) 은해사(銀海寺)

▼ 은해사(銀海寺) 부도밭...

▼ 팔공산(八公山) 은해사(銀海寺) 안내도

▼ 팔공산(八公山) 은해사(銀海寺) 입구 하마비...

▼ 은해사(銀海寺) 보화루... 이 글씨는 추사가 쓴 글씨인데... 원판은 성보박물관에 있다.

▼ 은해사(銀海寺) 대웅전... 원래 대웅전이었는데 아미타불을 모시면서 극락보전으로 바뀌었다. 원래 대웅전 현판은 추사가 쓴 것인데 현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 은해사(銀海寺) 극락보전 앞의 향나무... 수령이 나와있지는 않은데 다른 자료를 보니 450여년이라고 전한다. 옆은 범종루... 

▼ 은해사(銀海寺) 극락보전에서 바라본 보화루... 안산이 아늑하게 감싸준다.

▼ 은해사(銀海寺) 극락보전... 뒤에 탱화는 경북문화재자료...

▼ 은해사(銀海寺) 괘불탱...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현재는 문이 굳게 닫혀있다.

▼ 은해사(銀海寺) 산신각에서 바라본 산... 아주 근사하다.

 

 

은해사와 추사의 인연
 
조선조 왕조와 정조시대에 은해사는 영파성규 대사가 주석하면서 화엄종지를 크게 드날리고 있었다. 
이 때 추사는 경상감사로 부임한 그 생부 김노경 공을 따라서 경상도 일원의 명승지를 여행하면서 이 은해사 일대도 들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헌종 13년의 대 화재 뒤 헌종 15년에 마무리 지은 불사때 지어진 건물 중에서 대웅전, 보화루, 불광의 삼대 편액이 김정희의 글씨라서 마치 화엄루각과 같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 뒤 고종 16년(1879)에 영천군수 이학래가 다시 쓴 '은해사 연혁변'에서는 '문액의 은해사와 불당의 대웅전, 정각의 보화루가 모두 추사 김시랑의 글씨이고 노전을 일로향각이라 했는데 역시 추사의 예서체이다'라고 하고 있다.

추사 선생은 안동 김씨와의 세도 다툼에 패하여 55세 되던 헌종 6년(1840) 9월 2일에 제주도로 유배되어 9년 세월을 보낸 다음 헌종 14년(1848) 방면되어 다음해 봄에 64세의 노인으로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 유배중에 불교에 더욱 깊이 귀의하게 된 추사 선생은 영파대사의 옛터이며 또 자신의 진 외고조인 영조대왕의 어제 수호완문을 보장하고 있는 묵은 인연이 있음을 생각하고 현판과 문액을 기꺼이 써 주기로 작정하였던 것 같다.

이렇듯 거듭되는 인연에 제주도 유배기간 동안 갈고 닦은 기량을 최고로 발휘한 추사의 글씨가 새로 지은 전각들의 편액을 장식함으로써 과연 화엄루각의 장엄을 이루게 되었다. 1851년 추사는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 건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다시 유배의 길에 오르게 된다. 불과 2년 남짓의 짧은 서울 생활 동안에 쓰여진 것으로 추측되는 추사의 글씨가 다섯점이나 은해사에 전해지고 있는 것은 그만큼 은해사와 추사의 인연이 깊기 때문일 것이다.



간송 미술관의 최완수 선생은 추사선생 글씨 중 “은해사”의 글씨를 이렇게 평했다.

무르익을대로 익어 모두가 허술한 듯한데 어디에서도 빈틈을 찾을 수가 없다. 둥글둥글 원만한 필획이건만 마치 철근을 구부려 놓은 듯한 힘이 있고 뭉툭뭉툭 아무렇게나 붓을 대고 뗀 것 같은데 기수의 법칙에서 벗어난 곳이 없다. 얼핏 결구에 무관심한 듯하지만 필획의 태세 변화와 공간배분이 그렇게 절묘할 수가 없다.

문 위의 편액인 은해사, 불당의 대웅전, 종각의 보화루, 불광각, 노전의 일로향각 이 다섯점의 추사 글씨는 은해사의 자랑이자 소중한 문화재이다.<은해사 홈페이지에서 인용>

 

 

▼ 은해사(銀海寺) 산신각

▼ 은해사(銀海寺) 단서각

▼ 은해사(銀海寺) 지장전...

▼ 은해사(銀海寺) 조사전...

▼ 은해사(銀海寺) 3천불전...

▼ 은해사(銀海寺) 감로수조는 너무 아름답다...

▼ 은해사(銀海寺) 요사체...

▼ 은해사(銀海寺) 성보박물관 앞에 있는 5층석탑

▼ 은해사(銀海寺) 바깥으로 나가면 계곡이 이어진다. 그 위쪽으로 인종대왕 태실비가 있다. 팔공산에 있는 갓바위가 여기서 산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데 지도를 봐도 거리는 꽤나 멀다.

▼ 은해사(銀海寺)를 내려오면서 300년이 되었다는 소나무 숲에서 잠시 하늘을 감상해 보았다.

▼ 은해사(銀海寺) 입구의 분수대... 음악에 맞춰 분수 물줄기를 뿜어낸다.

 

728x90
반응형
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