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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 집터(李滉家址)

 

 

이황(李滉, 1501~1570) 집터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조선 성리학의 기초를 닦아 퇴계학파를 형성한 이황이, 젊은 시절 서울에서 관직생활을 할 때 살던 집이 있던 곳이다. 

이황(李滉, 1501~1570) 집터는 이황이 젊은 시절 서울에서 관직생활을 할 때 생활하던 집이 있던 곳으로,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덕수궁길 15에 해당한다. 이황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유학자로, 주자의 사상을 깊이 연구해 조선 성리학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다.
1501년(연산군 7) 11월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으며, 자는 경호(景浩)이며, 호는 퇴계(退溪),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1528년(중종 23) 소과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갔고, 1534년(중종 29) 식년시에서 문과 을과(乙科)로 합격했다. 그 후 승문원(承文院)과 시강원(侍講院), 홍문관(弘文館), 의빈부(儀賓府) 등에서 관직을 역임했다. 그러나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가 토계(兎溪) 인근에 양진암(養眞庵)을 짓고 학문에 전념했다. 이후 단양군수와 풍기군수로 부임했지만, 다시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토계 인근에서 학문과 후학 양성에 힘썼다.
특히 1550년(명종 5)에 형 이해(李瀣)가 참소를 당해 유배지로 가던 중 억울한 죽음을 맞자, 벼슬에는 뜻을 접고 학문 연구에만 몰두했다. 명종(明宗)이 수차례 관직을 제수하며 중앙으로 불렀지만, 번번이 병을 이유로 사양했다. 1561년(명종 16) 고향인 예안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세우고 후학 양성에 집중했다.
선조(宣祖) 역시 여러 번 관직을 제수하며 이황을 불렀다. 이때 이황은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하면서 무진봉사(戊辰封事)와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지어 올렸다. 그러나 이후에는 병을 핑계로 관직을 사양하고 낙향해 제자를 기르는데 힘썼다. 그러다 1570년(선조 3) 12월,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574년(선조 7) 도산서당의 뒤편에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세워 이황의 위패를 봉안했고, 1610년(광해군 2)에는 문묘(文廟)에 배향됐다.
이처럼 이황은 대부분의 시간을 고향인 안동에서 제자들을 양성하며 보냈지만 젊은 시절에는 과거에 급제해 중앙 관직을 역임하기도 했는데, 그때 이황이 생활하던 집이 바로 오늘날의 서소문동에 있었다.<서울중구역사문화자원에서 인용>


 

 

 

▼ 이황 집터(李滉家址) 표석 ... 서소문로에 있다. 길 건너에 유원빌딩이 보인다.

▼ 이황 집터(李滉家址) 표석은 한산빌딩 앞에 있다.

▼ 이황 집터(李滉家址) 표석... 시청역 10번 출구에서 20미터 거리...

▼ 이황 집터(李滉家址) 표석은 비교적 찾기 쉽다.

▼ 이황 집터(李滉家址) 옛날 표석... 표석 내용은 그대로인데 위치는 과거 덕수궁 돌담길에서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올라가는 길가 화단 안에 설치되어 있었다. 숲이 우거질 때는 잘 보이지도 않아서 보물 찾기 하듯 찾았다.

▼ 중구 서소문 일대 표석 현황

▼ 이황 집터(李滉家址) 옛날 표석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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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