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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이시영 6형제 집터(李會榮, 李始榮 6兄弟家址)

 

이회영(李會榮, 1867~1932) 집터는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독립운동가인 우당(友堂) 이회영과 그의 형제들이 만주로 망명하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다. 이회영은 조선시대의 명신(名臣) 이항복(李恒福)의 후손으로 그의 형제들과 함께 전 재산을 정리하여 독립운동에 쾌척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평생을 독립을 위해 싸운 인물이다.

이회영(李會榮, 1867~1932)은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독립운동가로,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호는 우당(友堂)이다. 이회영은 이항복(李恒福)의 후손이자 조선시대 말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李裕承)의 넷째 아들로 1867년 3월 17일 한성부(漢城府) 저동(苧洞)에서 태어났다.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李始榮)이 그의 동생이다. 이회영 집터는 이회영과 그의 형제들이 만주로 망명하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다. 이회영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安昌浩)를 비롯하여 양기탁(梁起鐸)·이동녕(李東寧)·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중앙위원으로 활약하였다. 이어 만주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할 것을 협의, 간도 용정촌(龍井村)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이상설(李相卨)을 책임자로 두어 동포의 교육에 주력하도록 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을 피탈 당하자 이회영은 형제일가들과 함께 전 재산을 정리해 항일운동에 헌납하고, 만주로 건너가 황무지를 개간하며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매진하였다. 이후 이회영의 독립투쟁은,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3·1운동 이전까지의 활동과, 무정부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그 이념과 노선에 따라 일제에 대한 테러 등의 무장운동을 전개한 중국에서의 활동으로 나뉜다. 1911년 만주에서 교민자치기관이자 독립운동단체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1912년 독립군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설립하였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후에 청산리전투의 주역이 된다. 그리고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상해(上海)에 수립되었으나 의견 차이로 분란이 끊이지 않자 상해보다는 북경(北京)에 체류하며 독립활동을 계속하였다. 1931년 한·중·일 아나키스트들과 합작, 독립운동단체인 항일구국연맹(抗日救國聯盟)을 결성하여 의장으로 취임하였고,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31년 이회영은 중국 국민당(國民黨)과 교섭하여, 자금과 무기지원을 확약 받았으나, 다롄[大連] 항구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 1932년 순국하였다. 이회영의 묘는 현재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이회영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2000년 중국 정부는 항일혁명열사 증서를 수여하였다. 이회영 집터는 이회영과 그의 형제들이 살았던 곳으로,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길 73에 해당한다. 중구 명동 YWCA 주차장 앞 소공원 화단에 2002년에 설치한 ‘이회영·이시영 6형제 집터’ 표지석이 서 있다.<서울중구역사문화자원에서 인용>

 


 

 

▼ 이회영,이시영 6형제 집터(李會榮, 李始榮 6兄弟家址) 표석.... 우당 이회영 흉상이 함께 있다.

▼ 이회영,이시영 6형제 집터(李會榮, 李始榮 6兄弟家址) 표석... 최근 이 일대가 건물이 많이 바뀌었다.

▼ 이회영,이시영 6형제 집터(李會榮, 李始榮 6兄弟家址) 표석... 주위가 많이 바뀌어 조만간 다시 방문할 예정이다.

▼ 중구 명동 일대 표석 현황

▼ 이회영,이시영 6형제 집터(李會榮, 李始榮 6兄弟家址) 표석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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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