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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현전 부제학 최만리(崔萬理), 영의정 최규서(崔奎瑞) 묘

 

최만리선생, 영의정 최규서 묘를 다녀온 기억이 나는데 블로그를 아무리 찾아봐도 없어서 난감한 기억이 난다. 서울 정동에 있는 어서각 기념표석을 정리하던 중 최규서 집터에 있던 어서각이 안성 최규서 묘역으로 이전한 사실을 알고 찾아봤으나 없어서 당황한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도 답사를 열심히 다녔는데 정리를 제대로 하지못해 블로그에 올리지 못한 것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너무도 많은 자료들이 묵혀 있다. 하나씩 꺼내서 닦아도 보고 정리도 하고 해서 하나씩 올려볼 생각이다.

안성 해주최씨 묘역을 방문한 때는 그곳에 어서각이 있는 줄 모르고 그냥 지나쳐 왔다. 다시한번 가야할 명분이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崔萬理)

 
아버지는 최하(崔荷)이다. 해동공자로 문헌공도와 사학12도를 세운 최충의 12대손이며 고려 중기의 저명한 문인으로 보한집(補閑集)의 저자인 최자의 6대손이다. 일찍이 불의와 타협을 거부하는 대쪽같은 성품을 지녔으며, 생원시에 입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증조부는 최공(崔珙), 조부는 최안해(崔安海)이고 아버지 최하(崔荷)는 예빈시윤을 역임하고 사후 증직으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충주지씨로 문하시랑을 지낸 지용수의 딸이다. 중화 양씨 판관 양미(楊美)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다섯 형제를 두었고, 딸 1명은 덕수이씨 이의석에게 출가하였다. 다섯째 아들 최연은 집현전 전한을 지냈는데 그는 후일 삼당시인의 한사람인 최경창의 고조부이자, 조선후기에 영의정을 지낸 최규서의 9대조가 된다.

할아버지 최안해의 동생은 최안택인데 그는 의병장 최경회의 7대조가 된다.

1419년(세종 1년) 생원으로 증광문과(增廣文科) 을과에 급제하였다. 그해 홍문관에 보임되었고, 이듬해 집현전이 설치되자 정7품 집현전 박사를 거쳤고 1427년 교리(校理)가 되었다. 교리 재직 중,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여 당상관으로 승진하였고, 응교·직제학·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427년(세종 9)에 교리로서 문과 중시(重試)에 급제하여 응교에 올랐으며 같은 해 7월에 세자(훗날의 문종)가 조현(朝見)할 때 서장관겸검찰관(書狀官兼檢察官)이 되어 직제학 정인지와 집의 김종과 함께 세자의 사부가 되어 주강(晝講)을 담당하였다. 이어 집현전 응교가 되어 우문학(右文學)을 겸하였으며, 좌필선(左弼善)이 된 정인지와 함께 번갈아 가며 세자에게 고금의 고사성어와 훌륭한 정치를 강론하였다.

집현전 관리로 세자의 서연을 담당하였으며, 그 뒤로 오랫동안 집현전에 몸을 담고 고제도(古制度) 연구에 몰두하여, 고제도의 해석과 번역, 적용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 중 오례(五禮)·시정(施政) 등 고제도의 연구와 해석에 심혈을 기울였고, 《자치통감훈의 資治通鑑訓議》·《정관정요주 貞觀政要註》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36년(세종 18) 4월에 집현전 직제학 최만리를 초시의 대독관(代讀官)이 되어 시험을 주관하였으며 1437년 집현전 직제학이 되었고, 1439년에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집현전에 돌아와 부제학이 되었다.<중략>

1443년 12월 세종의 왕명으로 최항·정인지·박팽년·신숙주·성삼문 등의 집현전 소장학자들이 훈민정음을 연구하고 운회(韻會)의 번역으로 한자음을 개혁하려 하자, 그는 이를 반대하였다.

처음에 최만리는 한자를 버려서는안 된다고 하면서 이두(吏讀)를 더 발전시키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고 했다.[3] 이것은 집현전 학자들 내에서도 상반되는 의견 대립을 조성했다. 젊은 학자들은 뭣때문에 우리의 글을 만드는 데 한자를 이용하겠는가 라며 최만리의 견해에 반기를 들었다.[3]

1444년 2월 최만리는 신석조, 김문, 하위지, 정창손 등 집현전 내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하는 학자들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반대상소를 올렸다.

이때 연명 상소를 올린 학자들은 이 상소에서 중국과 다른 문자를 만드는 것은 사대모화(事大慕華)에 어긋나며, 스스로 이적(夷狄)이 되려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점, 이두(吏讀)는 한자를 배우는 데 도움이 되지만 언문(諺文)은 그렇지 못해 유익함이 없다는 점, 널리 의견을 묻지 않고 갑자기 이배(吏輩) 10여 명에게 언문을 가르쳐 고인이 이미 이룬 운서를 고쳐 인쇄하려는 것은 신중하지 못하다는 점, 동궁(東宮)이 언문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점 등 반대의 이유 6가지를 제시했다.

최만리는 이때 상소를 올린 집현전 학자들의 대표격이었는데, 이에 세종의 노여움을 사 책망받은 뒤, 친국을 당하기도 했다. 다음날 석방되었으나 사직하고 낙향했다.

그밖에 일본과의 교역에서 규정을 위반하면서까지 일본에게 석류황(石硫黃)의 대가를 지나치게 후하게 지급해준 것에 대한 책임 추궁 상소, 진사시험 출제에서 시(詩)의 출제법이 잘못됨을 지적한 것, 그리고 이적(李迹)의 사형 결정이 모호하다며 사형의 남용에 반대하여 감형을 주장하는 등의 상소를 올려, 이를 시정하게 하였다.

1444년 사직하고 고향으로 낙향하였다. 1445년 10월 23일에 사망했다. 시호는 공혜(恭惠)인데 ‘공(恭)’은 공경하여 순하게 위를 섬기는 것, ‘혜(惠)’는 너그럽고 넉넉하고 자애롭고 어진 것을 의미한다.

사후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지문리 산3(현 안성시 원곡면 지문리)에 안장되었고, 부인 중화양씨와 합장되었다. 묘소 근처에는 아버지 최하와 어머니 지씨 내외, 둘째아들 예조좌랑 최정(崔埥)과 며느리 여흥이씨 내외의 묘소 등이 있고, 사당인 강호재가 세워졌다. 신도비는 1962년 이숭녕이 짓고, 후손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딸 최씨를 통해 율곡 이이의 증외고조부가 된다. 딸은 대제학인 윤회의 외손자인 덕수 이씨 이의석(李宜碩)에게 시집갔는데 최만리의 외손자는 이천이며 진외증손은 율곡 이이의 아버지인 이원수이다.<위키백과에서 인용>



최만리(崔萬理) 선생 묘 및 신도비
 
최만리 선생은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의 문신․학자로서 자는 자명(子明), 호는 강호산인(江湖山人), 본관은 해주(海州), 하(荷)의 아들이다. 세종 원년(1419)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홍문관(弘文館)과 집현전박사(集賢殿博士)를 겸임했고, 세종 9년(1427) 교리(校理)로서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한 뒤 집현전 직제학(直提學)․부제학(副提學)을 역임했다.

세종19년(1437)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부제학이 된 뒤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세종 26년(1444) 훈민정음(訓民正音) 반포(頒布)에 반대하여 한때 세종의 노여움을 샀고 환관(宦官)의 사모(紗帽) 착용과 척불(斥佛)․세자섭정(世子攝政) 반대 등의 상소를 올려 직간(直諫)으로 이름 높았다. 청렴결백한 태도로 일관,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백운산(白雲山) 기슭에 위치한 묘소는 부인 중화 양씨(中和楊氏)와 합장묘로서, 묘 앞의 구(舊) 묘비에는 「집현전부제학 최공만리지묘(崔公萬理之墓) 정부인(貞夫人) 중화양씨 부전(柎箋)」라고 새겨져 있다.

묘비 앞에는 상석․향로석, 그리고 좌우에는 문인석․망주석이 배치되었다. 묘비의 재료는 대리석이며, 규모는 높이 95cm, 폭37cm, 두께 18cm이다. 묘소 입구 우측에 위치한 신도비는 1962년에 건립된 것으로, 화강암 옥개와 장방형 비좌를 갖추었고, 비신은 대리석이다. 비문은 이숭녕(李崇寧)이 찬(撰)했는데, 비신은 높이 178cm, 폭 61.5cm, 두께 33cm의 규모이다.<묘 안내문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안성시 향토유적 제32호
문화재명칭 최만리(崔萬理) 선생 묘 및 신도비
소재지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지문리 산3
관리자(연락처) 해주최씨 종중

 

▼ 안성 해주최씨 묘역 용맥도

▼ 얼른 보면 최규서 묘역이 중심맥으로 보이지만 최만리 묘를 쓰고 약300여년 뒤에 최규서 묘역이 조성되었다. 즉 이 곳은 최만리 묘역이 중심맥이 되고 최규서묘역은 내백호 자락, 산성봉 아래로 외백호가 감싸주며, 시향봉 아래에서 청룡을 일으켜 본신안산을 이룬다. 묘역이 수구를 향하고 있어서 재물하고는 연이 박하다.

▼ 안성 해주최씨 묘역 위치도

▼ 최만리(崔萬理)선생 묘 및 신도비 안내문

▼ 최만리(崔萬理)선생 신도비

▼ 최만리(崔萬理) 선생 부친 최하(崔荷) 묘

▼ 최만리(崔萬理) 선생 부친 최하(崔荷) 신, 구 묘비

▼ 최만리(崔萬理) 선생 부친 최하(崔荷) 묘 후경... 아래에 보이는 묘가 최만리 선생 묘

▼ 최만리(崔萬理) 선생 묘... 뒤로 현무봉인 백련봉이 보이고 뒤쪽에 부친 최하(崔荷) 묘가 있다.

▼ 최만리(崔萬理) 선생 묘

▼ 최만리(崔萬理) 선생 묘 석물

▼ 최만리(崔萬理) 선생 구 묘비... 지금은 부인과 합장묘로 되어 있는데... 구(舊) 묘비에는 정부인(貞夫人) 중화양씨 부전(柎前)이라고 쓰여 있던 것으로 봐서 과거에는 부인 묘가 앞쪽에 상,하장으로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최만리(崔萬理) 선생 묘비

▼ 최만리(崔萬理) 선생 묘 후경

 

▼ 최만리(崔萬理) 선생 묘 백호자락에는 영의정 최규서 묘가 있는데... 그 곳에는 최만리의 둘째 아들, 넷째 아들 묘가 있다. 맨 위쪽에 둘째아들 최정 묘...

▼ 최만리(崔萬理) 선생 넷째 아들 최은(崔垠) 묘... 뒤로 보이는 묘가 영의정 최규서 묘... 시기적으로 볼 때 두 묘 사이에는 약 250여년의 시간이 존재한다.

 

 


영의정 최규서(崔奎瑞)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문숙(文叔), 호는 간재(艮齋)·소릉(少陵)·파릉(巴陵). 광주(廣州) 출신. 삼당시인으로 꼽히는 최경창(崔慶昌)의 현손이며, 최집(崔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진해(崔振海)이고, 아버지는 현감 최석영(崔碩英)이다.

1669년(현종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0년(숙종 6)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출사하였다. 이 때 서인의 나문에서 뛰어난 재주로 시명(時名)을 얻어 언관이 되었다.

정언으로 있을 때 “서북인을 통청(通淸)하라.”는 왕의 하교에 맞서 “인문(人文)이 황폐하고 가합자(可合者)가 없다.”는 논지로 소를 올려 논객(論客)의 면모를 보였다. 또한, 서인이 노소로 갈라졌을 때 나양좌(羅良佐)를 옹호하는 등 소론에 가담하였다.

1685년 지평에 올랐고, 이어 이조좌랑·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이 때도 최석정(崔錫鼎)의 파직을 변호하는 등 소론의 소장으로 활약하였다. 1689년 대사간에 올랐는데, 이 때 남인에 맞서 희빈 장씨(嬉嬪張氏)의 책봉을 반대하는 데에 앞장 섰다.

그 뒤 1694년 외직으로 전라도관찰사로 나갔으며, 이어 강화유수를 역임하였다. 주청부사(奏請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오기도 하면서 부제학, 형조·예조 판서, 대제학 등 현직(顯職)을 누렸다.

1711년 소론의 최석정 등이 삭탈관작되고, 1716년 병신처분(丙申處分)으로 소론이 실세를 거듭하자 지중추부사 등의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 광주(廣州)로 내려가 여생을 마치려하였다. 이 때 많은 사직소를 올린 것으로 유명하다.

1721년(경종 1) 소론이 득세하자 소론의 영수로 우의정이 되었고, 1723년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이 무렵 노론들이 연잉군(延礽君: 뒤의 영조)의 대리청정 등을 추진할 때 이에 맞서는 등 소론정권의 주역을 맡았으나, 강경파 김일경(金一鏡) 등이 신임사화를 일으킬 때는 완소(緩少)로 온건하게 대처하였다.

이어 치사(致仕)를 빌어 봉조하(奉朝賀)를 받고 일선에서 물러나 성묘를 핑계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1724년(영조 즉위년) 영조가 즉위하여 노론이 집권했을 때에도 무사하였다.

1728년 무신난(戊申亂)이 일어날 때, 용인에 있으면서 이 정보를 입수하고는 80세의 노구를 이끌고 제일 먼저 조정으로 달려와 이를 알린 다음, ‘역정포고의(逆情布告議)’라는 토난책(討難策)을 건의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원옥(寃獄)이 없을 것을 당부, 완소계열을 보호하려고 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 ‘일사부정(一絲扶鼎)’이라는 영조의 어필이 내려졌고, 이어 공신에 녹훈하려고 하자 이를 끝까지 거절하였다. 당인(黨人)의 중심 인물이었으나 온건하게 대처하였다. 또 지방관으로 나갔을 때에는 많은 선정을 베풀었다.

특히, 전라감사로 있을 때 선정으로 이름나 사람들이 부서한(簿書閑: 관청 문서가 한가함.), 공방한(工房閑: 아전들이 한가함.), 기악한(妓樂閑: 기생·풍악이 한가함.)의 ‘삼한(三閑)’이라 했다 한다. 영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시문집으로 『간재집』 15권이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영의정 최규서(崔奎瑞) 묘... 영의정까지 지낸 분으로 말년에는 영조를 위기에서 구한 공로도 있는 분인데 묘역에 문인석이 보이지 않는다.

▼ 영의정 최규서(崔奎瑞) 묘 근경

▼ 영의정 최규서(崔奎瑞) 묘 망주석

▼ 영의정 최규서(崔奎瑞) 묘비

▼ 영의정 최규서(崔奎瑞) 묘 후경

 

▼ 영의정 최규서(崔奎瑞) 친부 최석영(崔碩英) 묘와 묘비

▼ 영의정 최규서(崔奎瑞) 양부 최석유(崔碩儒) 묘와 묘비

▼ 영의정 최규서(崔奎瑞) 묘 오르는 길목에 있는 최숙손(崔淑孫)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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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