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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의정 유언호(兪彦鎬) 묘

 

안성 묘를 계속 올리는데 모두 2015년에 답사한 묘들이다. 사진으로 봐서 많이 바뀐 곳은 다시한번 다녀와서 올리기로 하고 크게 변화되지 않은 곳은 별다른 답사기 없이 사진으로 대신하니 이해 바랍니다.

 

유언호(兪彦鎬)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사경(士京), 호는 칙지헌(則止軒). 유철(兪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명건(兪命健)이다. 아버지는 우윤 유직기(兪直基)이며, 어머니는 김유경(金有慶)의 딸이다.
1761년(영조 37)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다음 해 한림회권(翰林會圈)에 선발되었다. 이후 주로 사간원 및 홍문관의 직책을 역임하였다. 1771년에는 영조가 산림 세력을 당론의 온상이라 공격해 이를 배척하는 『엄제방유곤록(儼堤防裕昆錄)』을 만들자, 권진응(權震應)·김문순(金文淳) 등과 함께 상소해 경상도 남해현에 유배되었다.
다음 해에 홍봉한(洪鳳漢) 중심의 척신 정치의 제거가 청의(淸議)와 명분을 살리는 사림정치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정치적 동지들의 모임인 이른바 청명류(淸名流)사건에 연루되어, 붕당의 타파를 탕평으로 생각한 영조의 엄명으로 흑산도로 정배의 명령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왕세손이던 정조를 춘궁관(春宮官)으로서 열심히 보호했으므로 정조 등극 후에는 홍국영(洪國榮)·김종수(金鍾秀)와 함께 지극한 예우를 받았고, 『명의록(名義錄)』 편찬을 주관하였다. 이름이 『명의록』에 올라 있다.
그 뒤 이조참의·개성유수·규장각직제학·평안감사를 거쳐, 1787년(정조 11) 우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경종과 희빈 장씨(禧嬪張氏)를 옹호하고 영조를 비판한 남인 조덕린(趙德隣)이 복관되자, 이를 신임의리에 위배되는 것으로 공격하였다.
이에 정조의 탕평을 부정한다는 죄목으로 제주도 대정현(大靜縣)에 유배되었다가 3년 뒤에 풀려났다. 이후 향리에 칩거했다가, 1795년 잠시 좌의정으로 지낸 후 다음 해 사망하였다. 1802년(순조 2) 김종수와 함께 정조묘(正祖廟)에 배향되었다.
정조 즉위년에 왕과의 대담에서 김구주·홍봉한 양 척신의 당을 모두 제거하려는 정조의 뜻을 잘 보좌하였다. 또, 영조 때 탕평책 하에서 왕권 강화책의 일환으로 통청권(通淸權)을 혁파하고, 개정한 한림회권법을 회천법(會薦法)으로 되돌리려는 논의에서도 소시법(召試法)의 중요성을 인정해, 정조의 청의와 의리를 우선해 조제하는 탕평책을 옹호하였다.
김우진(金宇鎭)·심환지(沈煥之)·김종수와 친하게 지내고, 홍봉한의 당을 공격함이 의리라는 김구주 당의 견해에 동조했다. 이에 순조대에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된 이후에는 시파(時派)로부터 정조에 대한 배신으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어려서부터 문학으로 이름이 있었으며, 외유내강의 인물로서 평가된다. 저서로는 『칙지헌집』이 있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안성시 향토유적 제21호
문화재명칭 좌의정 유언호(兪彦鎬) 묘
소재지 경기도 안성시 대덕면 건지리 286-43
관리자(연락처) 기계유씨

 

▣ 유언호 초상 (兪彦鎬 肖像) : 보물 제1504호

유언호 초상 (兪彦鎬 肖像)
 
조선후기의 학자 유언호(兪彦鎬, 1730~1796)의 58세 때의 초상화이다.
유언호는 본관이 기계(杞溪), 자는 사경(士京), 호는 칙지헌(則止軒)으로 정조 연간의 대표적인 문신이다. 세손 시절부터 정조를 잘 보좌하여 총애를 받았으며, 정조가 왕위에 오른 이후 규장각 창설에 참여하여 규장각 직제학을 역임했고 좌의정에까지 올랐다. 
<유언호초상>은 그림 왼편에 “崇禎三丁未 畵官 李命基 寫”란 기록이 있어 1787년에 이명기(李命基)가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이명기는 정조의 어진(御眞) 제작에도 참여했던 당대 최고의 화가 중 한 사람이었다. 또, 그림의 윗부분에는 정조의 어평(御評)이 기록되어 있다. 
<유언호초상>은 오사모에 흉배가 딸린 단령포 차림의 관복입상 그림으로, 유복이나 평상복 차림의 입상은 없지 않으나 관복정장의 입상 초상화로는 첫 사례가 아닌가 생각된다. 입상이면서 왼팔 소매 끝을 쥔 오른손이 살짝 보이도록 그린 것은 이명기 작<강세황 71세상>과 비슷하다. 이명기의 다른 초상화들과 마찬가지로 안면 표현의 입체감이 선명하고 옷주름의 음영이 뚜렷하다. 소맷자락 아래로 짙은 농묵표현과 관복의 밑으로 화문석에 떨어진 그림자의 묘사가 두드러진다. 또 “容體長闊 視元身減一半”, 곧 “얼굴과 몸의 길이와 폭은 원래 신장과 비교할 때 절반으로 줄인 것이다”란 글을 기술하고 있어, 유언호의 실제 키와 그림의 키 배율을 계산하여 그린 작품으로 주목된다. 
<유언호초상>은 유언호의 후손인 기계유씨(杞溪兪氏) 문중에서 보관해 오다가 1997년 12월 11일 규장각에 기증한 것이다.<문화재청에서 인용>

 

▼ 유언호 (兪彦鎬) 묘 원경

▼ 유언호 (兪彦鎬) 묘 안내문

▼ 유언호 (兪彦鎬) 묘 전경

▼ 유언호 (兪彦鎬) 묘 상석

▼ 유언호 (兪彦鎬) 묘 망주석

▼ 유언호 (兪彦鎬) 묘갈

▼ 유언호 (兪彦鎬) 묘 입수도두

▼ 유언호 (兪彦鎬) 묘 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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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