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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답사를 초파일날 했는데 김응하 장군 유적지 중 묘소를 방문하려고 했지만 여러 사정으로 못했다. 대신 김응하 장군 사당인 포충사와 철원향교를 답사를 했는데 두 곳 모두 문이 굳게 잠겨져 있어서 외관만 답사를 하고 왔다. 다행인 것은 담장이 낮아서 안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어서 큰 어려움 없이 답사를 했는데 다만 경내에 있는 비문을 제대로 읽어 보지 못한게 조금 아쉽다.

어차피 안으로 들어가더라도 크게 달라질게 없는데 굳이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은 것은 왜일까? 아마도 못 가진 것에 대한 욕구 아닐까?

사진을 멀리서 찍다보니 흐릿한 것이 많은데 독자들은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소개 정도로만 이해해 주시길.....


 

▣ 포충사(褒忠祠) 

 

1665년(현종 6) 선천군수 김응하(金應河)의 절의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사우(祠宇).  1619년(광해군 11) 후금과의 전투에서 당시 선천군수로 전사한 김응하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화지리에 건립하였다. 
김응하는 명나라의 요청으로 새로이 흥기하는 후금을 토벌하기 위하여 도원수 강홍립(姜弘立)과 같이 좌영 군병을 이끌고 출정하였는데, 부차령(富車嶺)의 전투에서 명나라 군사가 크게 패하자 이를 구원하다가 전사하였다. 명나라 신종(神宗)은 그를 요동백(遼東伯)에 추봉하였고, 조선에서도 영의정에 추증하였으며, 충무공(忠武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특히, 효종대에 들어와 북벌론(北伐論)의 일환으로 존명의리(尊明義理)가 강조되는 분위기 속에서 송덕비를 세우고 1665년 철원유생 임창립(任昌立) 등의 주동으로 그가 거처하던 곳에 사당을 세워 철원부사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1668년 철원유생들이 상소하여 포충사로 사액되었으며, 1871년(고종 8) 대원군에 의한 서원철폐 때에도 특별히 존속되었다. 이 건물은 6·25전쟁 때 불타버리고 현재는 김응하장군묘비(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05호)만 남아 있다. 안동김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포충사(褒忠祠) 사적비와 안내판

 

▼ 포충사(褒忠祠) 안내판

 

▼ 포충사(褒忠祠) 사적비

 

▼ 포충사(褒忠祠) 사적 비문

 

▼ 포충사(褒忠祠) 외삼문

 

▼ 포충사(褒忠祠) 경내

 

▼ 포충사(褒忠祠)에 김응하 장군 묘비가 있다.

 

▣ 요동백 김응하 장군묘비(遼東伯 金應河 將軍廟碑)

 

건주여진(建州女眞) 반란의 토벌 원군으로 참전하여 전공을 세운 김응하의 묘정비로,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에 위치한다. 1985년 9월 13일에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05호로 지정되었고, 철원군에서 관리해오고 있다.김응하(金應河, 1580~1619)의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철원 출신이다. 25세 때 무과에 급제한 후 변방의 군직을 거쳐 선천군수(宣川郡守)를 역임하였다. 누르하치를 중심으로 건주위(建州衛)가 반란을 일으키자, 명나라에서 조선에 원군을 요청했는데, 1618년(광해군 10) 좌영장으로 참전하여 전공을 세웠으나 이듬해 3월 전사하였다. 이에 명(明)에서는 ‘요동백(遼東伯)’으로 추증하였으며, 조선에서도 영의정으로 추증하고 시호를 충무(忠武)라고 하였다. 1665년(현종 6) 철원에 사당이 건립되었고, 1668년(현종 9)에 ‘포충사(褒忠祠)’로 사액(賜額)되었다.포충사는 6·25 때 묘비(廟碑)를 제외하고 모두 소실되었다. 1974년에 묘비를 3군영내(三軍營內)로 이전했다가, 1984년 다시 현재 위치로 옮겼다. 비의 총 높이는 3.89m이며, 비신은 오석(烏石)으로 크기는 96㎝×215㎝×32㎝이다. 비문은 전·후면에 모두 새겨져 있으며, 송시열(宋時烈)이 글을 짓고 박태유(朴泰維)가 글씨를 썼으며,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전서로 제액(題額)을 썼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문화재 지정 :  강원도 유형문화재 105호 

 문화재 명칭 :  요동백 김응하 장군 묘비 

 문화재 주소 :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화지리 산1-1 

 관리자(연락처): 철원군, 안동김씨 

 

▼ 포충사(褒忠祠) 측면에서 바라본 경내

 

▼ 요동백 김응하 장군묘비(遼東伯 金應河 將軍廟碑)

 

▼ 요동백 김응하 장군묘비(遼東伯 金應河 將軍廟碑) 안내판

 

▼ 요동백 김응하 장군묘비(遼東伯 金應河 將軍廟碑) 안내판

 

▣ 김응하 장군(金應河 將軍) 이야기

 

전설에 의하면 철원지역의 명산인 금학산 정기를 받아 태어난 8척 장사 김응하 장군은 출생담에서도 영웅신화에서 보이는 비범한 인물의 출생담과 같이 신비한 면이 있다.옛날 철원지역 금학산에 이무기가 나타나 고통스러워 하고 있는 것을 본 포수가 이무기를 쏘자 그 입에서 새 한 마리가 나와 교미중인 소(于)의 속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포수가 다시 소를 때리자 소에서 나온 새는 교미중인 개의 속으로 들어갔고, 포수가 다시 개를 때리자 개에서 나온 새는 다시 여염집의 늙은 부부가 동침하는 속으로 찾아들었다. 이를 지켜 본 포수는 늙은 부부에게 장차 영웅이 출생할 것이라는 예언을 남기고 사라졌고, 이후 아이를 갖게된 노부부는 건장한 사내 아이를 출산하였다고 한다.충무공 김응하장군신도비가 세워져 있는 철원군 동송읍 하갈리에는 여우산(如愚山)이라는 산이 있는데, 이곳은 김응하 장군의 출생담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응하 장군의 출생담이 이와같이 우여곡절을 겪은 것은 이무기로 태어날 범상치 않은 그가 뜻하지 않게 나타난 사냥꾼에 의해 사람으로 태어나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이와같이 그의 출생담이 우여곡절을 겪는 것은 그가 평민출신의 영웅이기 때문에 종래의 전설의 내용과 다른 내용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실제로 그는 고려의 명장 김방경(金方慶)의 후손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의 출생에서 보이는 바와같이 그의 일생이 파란만장함을 예고하는 것만은 사실인 듯 하다.김응하 장군은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간 후, 처음에는 별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 후 평소 김응하의 장수로서의 재능을 아끼던 박승종이 병조판서가 되면서 선전관으로 발탁되었으나 이듦해 주위의 질시를 받아 파직당하는 등 평탄치 못한 관직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김응하 장군은 광해군 때인 1618년 명나라가 후금을 칠때 조선에 원병을 요청했을 때, 원군 파견의 결정에 따라 조선원군 좌영장으로 일명 중국에서 일어난 건주위(建州衛)의 난(亂)을 평정하기 위해 조선원군으로 종군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명이 대패한 부차령 전투에서 3천 병력으로 6만의 적군과 접전, 최후까지 용전분투하였으나 역부족으로 40의 한창의 나이에 요절하였다고 한다.김응하 장군은 사후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1620년 명나라 신종(神宗)에 의해 요동백(遼東伯)에 추봉(追封)되었던 역사적 인물로 지금도 철원군 철원읍 화지 5리 포충사 경내에 요동백 김응하 장군 묘정비(강원도 유형문화재 제 105호)가 세워져 있다. 그리고 명나라에까지 명성을 떨친 충무공 김응하 장군의 무훈과 충절을 기리는 묘정비가 숙종 9년(1683)에 건립되었다.특히 포충사는 조선 효종때 북벌론(北伐論)이 득세하면서 존명의리(尊明義理)가 강조되는 당시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송덕비를 세우고 제사를 지내게 되었으며, 1871년 대원군에 의한 서원철폐때도 특별히 존속될 정도로 커다란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실제로 도내 3대 서원중하나에 속한다. 그러나 포충사는 아쉽게도 6.25때 불에 타버리고 현재는 비석만 남아 있다.전설에 의하면 그는 만주 원정중 버드나무 밑에 서서 전사했는데, 그의 시신이 중국 병졸들의 등을 내리쳐서 죽였다고 한다. 그리고 김응하 장군의 가족이 만주에서 혼백을 모셔 오는데 그의 혼이 공중에서 가족들에게 지시했고, 가족들이 그의 혼을 잘 모셨다고 한다. 때문에 사후에도 여전히 비범하고 신비로운 존재로 전해지고 있다.

<강원도 세상-김응하장군 이야기(강원도청 발행)에서 인용>

 

▼ 포충사(褒忠祠) 내삼문

 

▣ 철원향교(鐵原鄕校)

 

철원향교(鐵原鄕校)는 강원도 철원군에 있는 향교이다. 2016년 9월 27일 철원군의 향토문화유산 제3호로 지정되었다. 철원향교는 태봉국 시절 왕건의 사저 자리(現 月下里)에 설립하였다 하나 건조년대는 미상이다.조선 선조 원년(서기 1568년) 유림들에 의해 중건되었으며 임진왜란(서기 1595년)의 병화로 소실되었다. 그 후 인조 15년(서기 1637년) 유림들이 재건하였으며 일제치하에서는 군수 유흥종(柳興鍾)이 대성전과 명륜당 등을 중축하였는데 해방 후 공산치하에서 재산이 몰수돼 고아원으로 활용하던 중에 6·25전란으로 소실되었다.1945년 수복 후 일시 포충사(褒忠祠)로 옮겨 모셔졌다가 유림들의 협조와 정부보조로 화지리로 이전하여 관리하다가 원위치 복원계획(종전 월하초교 부지)에 따라 2004년 12월에 포충사로 임시 이전하였다. 2009년 철원읍 화지리 284번지에 철원향교를 복원하여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철원향교 대성전 문묘(文廟)에 봉안된 25위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五聖 : 孔子, 顔子, 子思, 曾子, 孟子二十賢 : 薛聰, 程顥, 安珦, 金宏弼, 趙光祖, 李滉, 李珥, 金長生, 金集, 宋浚吉, 崔致遠, 朱喜, 鄭夢周, 鄭汝昌, 李彦迪, 金麟厚, 成渾, 趙憲, 宋時烈, 朴世采<위키백과에서 인용>

 

◐ 문화재 지정 :  향토문화유산 제3호 

 문화재 명칭 :  철원향교 

 문화재 주소 :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금학로 591 (철원읍) 

 관리자(연락처): 철원군, 

 

▼ 철원향교(鐵原鄕校) 원경

 

▼ 철원향교(鐵原鄕校) 외삼문

 

▼ 철원향교(鐵原鄕校) 명륜당

 

▼ 철원향교(鐵原鄕校) 경내

 

▼ 철원향교(鐵原鄕校) 비문

 

▼ 철원향교(鐵原鄕校) 복원비

 

▼ 철원향교(鐵原鄕校) 공부자묘정비

 

▼ 철원향교(鐵原鄕校) 대성전

 

▼ 철원향교(鐵原鄕校)에 바라본 도피안사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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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