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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예전에 만들었던 블로그가 틀이 깨지고 카카오에서 운영하는 정책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원하는 형태대로 유지가 안되서 티스토리로 메인 블로그를 옮겼습니다. 예전 블로그에 있던 자료를 하나씩 옮기고 있는데 시간이 오래 지난 것은 내용이나 사진이 현재와 맞지 않는 것도 많습니다. 이점 이해바랍니다. 추후 다시 방문할 기회가 있으면 내용과 사진을 수정할 예정입니다.>
회안대군(懷安大君) 이방간(李芳幹) 묘
전주에 자주 가면서도 회안대군 묘를 지척에 두고도 차일피일 미루면서 가보지 못한 곳이었는데 이번 정기답사에서 드디어 찾게 되었다. 답사지나 여행지나 마구잡이로 훑어서 가게되면 다음번에 그 감흥이 반감된다. 그래서 조금은 아껴둬야할 곳도 많은게 사실이다. 요즘 마구잡이로 답사를 하면서 느끼는 것이다. 이곳도 벼르고 찾아온 곳이라 그 감흥이 남다르다.
회안대군 묘는 그 뒷쪽 용맥을 따라 올라가면서 권력의 무서움을 느껴볼 필요가 있는 곳이다. 당대에 왕권강화와 후대의 일까지 미리 예측하여 그 맥을 자른 일을 보고 권력에는 형제도 없고 자식도 없는 무서운 현실만 있다는 것을 이 묘역을 답사하면서 많이 느끼게 된다.
군왕지지라고 할 만큼 국세가 넓게 잘 감싸주고 있었고 용맥을 따라 절맥한 흔적들이 몇군데 눈에 보였다. 더운 날씨에 용맥을 따라 오르다보니 시원한 바람이 무척 반갑다. 특이하게 주산이 옆에서 와서 회안대군묘를 일구고 있다. 이곳을 물형론으로는 늙은 쥐가 밭으로 내려오는 노서하전형이라고 하는데 물형을 이해하려면 멀리 안산에서 봐야 그 형태를 알수있는데 단지 묘역만 봐서는 물형을 이해하기가 좀 어렵다. 이래서 한두번 답사를 해서는 제대로 묘역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또한번 느끼고 돌아왔다.
회안대군(懷安大君) 이방간(李芳幹) 이름은 이방간(李芳幹). 아버지는 태조이며, 어머니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 韓氏)이다. 첫째부인은 판서 민선(閔璿)의 딸이고, 둘째부인은 판서 황형(黃亨)의 딸이며, 셋째부인은 정랑 금인배(琴仁排)의 딸이다. 고려왕조에 벼슬해 군기시소윤(軍器寺少尹)을 역임하였다. 조선왕조가 개창되자 1392년(태조 1) 회안군(懷安君)에 봉군되었다. 그 뒤 1398년 회안공으로 개봉되면서 의흥삼군부좌군절제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른바 제2차 왕자의 난으로 유배 중인 1401년(태종 1) 회안대군이 되었다. 1398년(정종 즉위년) 8월에 발생한 제1차 왕자의 난에 정안군 이방원(靖安君 李芳遠)을 도와 정도전(鄭道傳) 일파를 제거하는 데 세운 공으로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으로 책록되었다. 그 뒤 개국공신 1등에 추록되었고, 1399년 풍해도(豊海道)와 서북면의 병사를 분령하였다. 이듬해 지중추부사 박포(朴苞)의 이간에 회유되어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하면서 토산(兎山: 지금의 황해도 토산)으로 유배되었다. 1400년 2월에 3성의 장무(掌務)가 “방간이 사사로이 군대를 일으켜 골육을 해하려고 했을 때 왕께서 처음에는 도승지를 보내시어 동병하지 말 것을 명했으나 듣지 않고, 군대를 발했으니 대법으로 다스리소서.“라고 하면서 치죄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정종과 이방원의 관용으로 죄가 더해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유배된 토산이 전일에 군사를 분령한 곳이기 때문에 후일의 염려가 있다 해서 안산으로 이치(移置)되었을 뿐, 전지(田地)와 식읍을 받았으며 매년 초하룻날에는 한양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받았다. 1400년 9월에는 문하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익주(益州)로 이치되었다. 태종이 즉위한 뒤에도 계속 관용을 받아, 이듬해 5월에는 태종이 보낸 의원으로부터 치료를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6월에는 실행되지는 못했지만 서울로의 소환까지 논의되었다. 1402년에는 대간으로부터 전렵으로 일을 삼는 등 뉘우침이 없으니 경계와 보전을 위해 제주로 이치하라는 요청이 있었다. 그러나 순천성(順天城)에 이치되는 것으로 그쳤다. 1404년 왜구의 화를 피해 익주로 다시 옮겨졌고, 1410년 8월에는 완산(完山)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1416년 형조·대간의 집요한 청죄로, 아들 이맹중(李孟衆)과 함께 공신녹권(功臣錄券)과 직첩을 몰수당했다. 그리고 1417년 홍주(洪州: 현재 홍성)로 이치되었다. 세종 치세 때에도 누차 치죄가 논의되었지만 상왕과 세종의 관용을 받았다. 1419년 노비 100구만 속공(屬公)되었을 뿐 천명(天命)을 누리다가 홍주에서 죽었다. 오랫동안 『선원록(璿源錄)』에서 제외되다가 1605년(선조 38) 선원록교정청(璿源錄校正廳)의 계(啓)를 계기로 신설(伸雪)이 논의되었다. 그 뒤 1680년(숙종 6) 선원록이정청(璿源錄釐正廳)의 계품(啓稟)에 따라 그 자손과 함께 『선원록』에 재록(載錄)되면서 신설되었다. 시호는 양희(良僖)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문화재지정 | 유형문화재 제123호 |
문화재명칭 | 회안대군(懷安大君) 이방간(李芳幹) 묘 |
소재지 |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금상동 59-5번지 |
관리자(연락처) | 전주이씨회안대군파 |
▼ 회안대군 묘 앞에 있는 회안대군 묘비각.
▼ 회안대군 묘갈
▼ 회안대군 묘 안내문
▼ 회안대군 묘 전경
▼ 회안대군 묘
▼ 회안대군 묘 석물...
▼ 회안대군 묘 망주석... 조선초 왕자들 묘역에 있는 망주석은 이와 유사하다.
▼ 회안대군 묘 문인석
▼ 회안대군 묘비
▼ 회안대군 묘비 좌우후면...
▼ 회안대군 묘 측면
▼ 회안대군 묘 상석 뒷쪽 혼유석이 특이하다.
▼ 회안대군 묘 후경
▼ 회안대군 묘 입수도두
▼ 회안대군 묘 용맥을 따라 위로 올라가면....
▼ 용맥을 절단하기 위해 유지(溜池)를 파서 맥을 잘랐다.
▼ 윗쪽으로 더 오르면 회안대군 묘 현무봉이 나오는데... 암석으로 이뤄져 있다.
▼ 이곳 석맥도 자른 흔적이 보인다.
▼ 묘역 청룡쪽에 있는 봉우리에서 회안대군 묘로 맥이 들어온다. 즉 이 산이 주산이다.
▼ 현무봉 뒤로 병풍처럼 산들이 둘러져 있다.
▼ 멀리 산들이 겹겹이 둘러져 있어서...
▼ 군왕지지 국세는 대략 이런 형태로 산들이 빙 둘러져 있다.
▼ 앞쪽 논에서 바라본 회안대군 묘역... 여름에 방문해서 숲이 우거져 있어 물형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제 다른 블로그 '좋은터 길라잡이' 2012. 6. 28 올린 글을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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