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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 민주열사 희생자 묘역(전태일, 박종철, 문익환)

 

남양주 답사 때 마다 모란공원묘지 민주열사 묘지를 답사하려고 몇번 계획을 했었는데 그때마다 나중에 별도로 한번 찾아가자는 일행의 말에 미루고 미루다가 지난 2월에 찾았다. 겨울이 막 지나고 날씨가 봄날씨 같은 날에 찾은 모란공원묘지는 아직도 겨울철의 싸한 기운이 감돌고 더구나 묘역마다 새겨진 한많은 사연들을 읽다보니 다른 어느 묘역보다 답사객의 발걸음을 무겁게 만들고 있다. 이곳은 입구에서부터 민족 민주열사 희생자 묘역이 자리잡고 있었다. 민주화 투쟁에 평생을 바친 분들이 누워 계시는 곳으로 발걸음이 제대로 떨어지질 않는다.이날 답사를 하는 중에 어느 한 곳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전기에 감전된 듯 온몸이 경직됨을 느끼고 서둘러 답사를 끝냈다. 아마도 내 기운이 그들의 기운에 못 미치는 것 같다. 허구헌 날 묘만 찾아다니는 사람도 가끔은 묘소에서 쭈뼛함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이럴 때는 잠시도 머뭇거리지 말고 답사를 종료하는 게 옳은 처사다. 氣의 흐름이 서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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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지정 미지정
문화재명칭 민족민주열사묘역(모란공원묘지)
소재지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묘지
관리자(연락처) 모란공원묘지

 

▼ 민족 민주열사 희생자 묘역...

 

▼ 민주열사 추모비

 

▼ 남양주 마석의 모란공원묘지... 민족 민주열사 희생자 묘역...

전태일(全泰壹)

 

1948년 8월 26일~1970년 11월 13일. 현대 노동운동가. 본관은 경산(慶山)이고, 출신지는 경상북도대구(大邱)이다. 부친은 전상수이다.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와 남대문초등학교 4학년 때 중퇴했다. 이후 1965년에 평화시장 소재의 의류제조 회사의 재단사가 되었다. 1968년 근로기준법에 대해서 알고 난 후, 근로기준법 준수 및 근로조건 개선 모임을 준비하기 시작하였고, 1969년 6월 노동운동조직인 ‘바보회’를 만들고, 평화시장의 노동조건 실태를 조사하였다. 또한 근무하던 회사가 근로기준법을 지키지 않자, 노동환경 조사 결과를 토대로 노동청과 서울특별시에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진정서의 내용은, 
하루 근무시간을 10~12시간으로 단축해 줄 것, 
한 달에 휴일 2일을 매주 일요일(4일)로 연장할 것, 
건강검진은 확실하게 할 것, 
시다공의 임금을 하루 70~100원에서 50% 인상해 줄 것 등이다.

1970년 10월에 삼동친목회를 조직하였고, 근로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시위를 기도하였다. 그러나 정부가 진정서에 대해 반응을 보이지 않자, 한 달 뒤에 청계천 6가의 평화시장 구름다리 앞에서 500여 명의 노동자들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현수막을 들고 거리시위를 벌였고, 근로기준법 준수와 휴일 보장, 노동자를 혹사 시키지 말 것을 주장하며 분신 하였다.그의 죽음은 당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고, 특히 당시의 정부와 기업인, 관료들에게 경각심을 주었다. 그의 죽음으로 시작된 노동운동의 발달은 1970년대 청계피복노동조합의 활동을 비롯해 민주노동운동 발전의 뿌리가 되었다. 이후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자, 1983년 《전태일 평전》이 편찬되었고, 1990년대에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제작되었다.전태일은 2001년에 민주화운동 보상법에 따라 정부에 의해 민주화운동 관련자로서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1970년 2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며, 모란공원에 안치되었다.<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 모란공원묘지하면 떠오르는 인물.. 전태일 묘역

  

▼ 전태일 묘역 전경...

  

▼ 전태일 묘역에는 많은 사람이 다녀간 흔적이 보인다..

 

▼ 전태일 동상...

  

▼ 전태일 추모비...

  

▼ 전태일 묘역 측경

  

▼ 전태일 묘역 후경

 

▼ 전태일 묘역 뒤에는 그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 묘가 있다.

  

▼ 전태일 어머니 이소선 여사 묘

  

▼ 전태일 어머니 이소선 여사 묘비 뒷면

  

▼ 전태일 어머니 이소선 여사 묘 후경... 왼쪽 앞에 아들 전태일 묘가 있다.

 

박종철(朴鐘哲)

 

1964년 4월 1일~1987년 1월 14일. 출생지는 부산이다. 부친은 박기정(朴紀正)이고, 모친은 정차순이다. 1983년 서울대학교 언어학과에 입학하여 언어학과 학생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87년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 공안 당국 취조실에 끌려가 학생운동을 하던 선배 박종운(朴鍾雲)의 소재를 취조 받았다. 취조 중에 심한 고문으로 1987년 1월 14일에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하였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정국은 혼란에 빠져들게 되었고, ‘6월 민주항쟁’의 불씨가 되었다.
경찰은 처음에 이 사건을 단순 쇼크사로 축소하여 발표하였으나 당시 부검의 오영상이 고문의 심증을 증언하면서 사건발생 5일 만인 1월 19일에 물고문 사실을 공식 시인하고, 수사를 진행했던 경관 조한경(趙漢慶)과 강진규(姜鎭圭)를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으로 구속시켰다.
야당 신민당은 정부여당에 대대적인 공세를 개시하는 한편, 재야단체들 또한 규탄성명을 발표하고 진상규명을 위한 농성에 들어갔으며, 각계인사 9천 명으로 구성된 ‘박종철군 국민추도회’가 결성되면서 정국은 고문정권규탄 및 민주화투쟁의 열풍에 휘말리게 되었다.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정부는 내무장관 김종호와 치안본부장 강민창을 전격 해임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였으나, 1987년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경찰이 이 사건을 축소조작 하였고, 고문가담 경관이 5명이었다’는 성명을 밝표하면서 정부의 도덕성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 후 이 사건과 관련된 추모집회와 규탄대회는 개헌논의와 연결되었고, 결국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1987년 이후 매년 1월 14일에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주최로 부산과 서울 등지에서 추모제를 거행하고 있다. 2008년 6월 서울지방경찰청에서 박종철이 고문을 받다가 죽은 치안본부 대공 분실의 고문실을 보존하여 경찰청 인권센터로 명명하고 기념관을 조성하였다. 1997년 6월 서울대학교 교내에 추모비를 건립하고, 2004년 5월 18일 혜광고등학교 교내에도 추모비를 건립했으며, 2010년 6월 10일 부산 민주 공원에 추모석을 설치하였다.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는 1998년에 박종철 평전 『그대 온몸 깃발 되어』를 출간하였다.<부산역사문화대전에서 발췌>

 

▼ 전태일 묘역 위에는 민주열사 박종철 묘역이 있다.

  

▼ 박종철 묘역은 전순이 좁아서 사진 촬영이 어렵다..

  

▼ 박종철 묘

  

▼ 박종철 묘비

  

▼ 박종철 묘 전경

 

  

▼ 박종철 묘역 입구.. 흘러가는 맥을 타고 측맥으로 묘를 썼지만... 자리는 아니다..

 

문익환(文益換)

 

1918년∼1994년. 현대 목사‧신학자‧시인. 호는 늦봄이다. 출생지는 만주 북간도(北間島)이다. 부친 목사 문재린과 모친 신신묵 사이에서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만주 한인(韓人)들이 세운 명동소학교와 은진중학교를 거쳐 평양 숭실중학교‧북간도 용정광명학교를 다녔다. 만주의 봉천신학교를 졸업하고 한인교회 전도사로 활동하였다.
1947년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신학석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한국신학대학과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강의하면서 민주화투쟁과 조국통일운동에 진력하며 1978년 유신헌법비판성명서를 발표, 1980년 YWCA 위장결혼 사건, 1986년의 인천 5‧3사건과 서울대학교 연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89년에는 방북하여 김일성을 면담하고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공동성명을 발표하는 등 활발한 행보를 보였다. 그 후 민주‧통일국민회의 의장‧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의장 등을 역임하였다.
주요 저서로 《새삼스런 하루》‧《옥중일기》 외에 여러 시집이 있으며, 수필집 《새 것, 아름다운 것》‧《통일을 비는 마음》 등이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 문익환 목사 묘 전경...

  

▼ 문익환 목사 묘비..

  

▼ 문익환 목사 묘 측경

  

▼ 문익환 목사 묘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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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