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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공원묘지1(박영효, 장기려, 피천득 외)

 

모란공원묘지의 민주열사 묘지를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마침 그날이 3.1절이었는데 태극기를 제작하였다는 박영효 묘가 그곳에 있어 둘러보았다. 묘는 봉분이 없이 평장으로 비석을 눕혀서 만든 형태인데 이런 묘들이 남양주 석실마을의 조말생 후손들 묘에서도 보였다. 아마도 묘를 없애는 한 과정으로 봉분을 없애고 그 뒤에 남은 묘비를 눕혀서 묘를 대신하는 것처럼 보인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지금 산하에 널려있는 묘비들은 과연 어떻게 처리를 할것인지... 남는 것은 돌 뿐인데 돌로 묘비를 새기는 것은 고려해야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 
너도 나도 묘비를 새기다 보니 자연스럽게 흙으로 돌아가야할 묘들이 그러질 못하고 계속 떠돌이 생활을 해야 할듯 보이니 걱정스러울 뿐이다.
다른 유명인사 묘들도 그곳에 있는데 관리사무소에 가서 누구누구 묘가 어디있느냐고 구체적으로 물으면 가르쳐 주지만 유명인 묘 좀 알려달라는 식으로 말하면 전혀 가르켜주지 않는다. 그러니 대략 이곳에 계시는 분의 성함 정도는 알고 관리사무소를 방문해야 할 듯 보인다.

 

 

박영효(朴泳孝)
 
오1861년(철종 12)∼1939년. 조선 말기의 정치가. 본관은 반남(潘南). 초명은 무량(無量). 자는 자순(子純), 호는 춘고(春皐)‧현현거사(玄玄居士). 수원 출신. 판서 박원양(朴元陽)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이고, 큰형은 박영교(朴泳敎), 작은형은 박영호(朴泳好)이다.

1. 개화당 조직
1872년(고종 9)철종의 부마가 되었으나 3개월 만에 사별하였다. 금릉위(錦陵尉) 정1품 상보국숭록대부(上輔國崇祿大夫)에 봉해졌다. 큰형을 따라 박규수(朴珪壽)의 사랑을 출입하면서 오경석(吳慶錫)‧유대치(劉大致)‧이동인(李東仁) 등 실학, 특히 북학파(北學派)의 학맥을 이은 개화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아 1879년경 김옥균(金玉均)‧서광범(徐光範) 등과 개화당(開化黨)을 조직하였다.

2. 일본견문과 개화시책
1882년 9월 임오군란의 사후수습을 일본정부와 협의하기 위하여 특명전권대신 겸 제3차수신사로 임명되어 종사관 서광범 등 14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일본으로 갔다. 그곳에 약 3개월간 체류하면서 일본정계의 지도자 및 구미 외교사절들과 접촉하여 국제정세를 파악하는 한편, 명치일본(明治日本)의 발전상을 살펴보았다. 이때 항해하는 배 위에서 태극사괘(太極四卦)의 국기를 제정, 일본에 도착한 직후부터 사용하였다.
1883년초 귀국한 뒤 한성판윤에 임명되어 박문국(博文局)‧순경부(巡警部)‧치도국(治道局)을 설치하여 신문발간과 신식경찰제도의 도입, 도로정비사업, 유색의복(有色衣服) 장려 등 일련의 개화시책을 폈다. 그러나 민태호(閔台鎬)‧김병시(金炳始) 등 수구파의 반대에 부딪혀, 삼국(三局)은 폐쇄되고 광주유수 겸 수어사(廣州留守兼守禦使)로 좌천되었다. 이때 수어영에 연병대(鍊兵隊)를 신설하여 신식군대의 양성에 주력하였다. 다시 수구파가 이를 문제삼음으로써 같은해 12월 사임하였다. 그러나 그의 노력으로 《한성순보(漢城旬報)》의 창간을 볼 수 있었다.

3. 갑신정변과 망명
이처럼 정계진출이 계속 좌절되자, 1884년 2월 미국유람을 계획하였으나, 이 계획 역시 좌절되었다. 이때 개화당 인사들이 정권장악을 기도하자 이에 가담하여 먼저 미국에 협조를 얻고자 접촉하였으나 미국은 불응하였다. 다시 일본에 접근하여 여러 차례의 협의 끝에 군사적 지원을 확약받고, 같은해 12월 갑신정변을 일으켜 친청수구파(親淸守舊派)를 숙청하고 혁신내각을 수립하여 전후영사 겸 좌포도대장(前後營使兼左捕盜大將)직을 맡아 병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청국군의 즉각적인 개입으로 정변이 삼일천하(三日天下)로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뒤 본국정부의 집요한 송환기도와 일본정부의 냉대로 1885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그곳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되돌아와 야마자키(山崎永春)로 이름을 고친 뒤 명치학원(明治學院)에 입학, 영어를 배우면서 미국인 선교사들과도 친분을 맺었다.

4. 개화상소
1888년초 일본에 있으면서 고종에게 국정 전반에 관하여 13만여자에 달하는 장문의 개혁상소를 올렸다. 이것이 이른바 ‘개화상소(開化上疏)’ 혹은 ‘건백서(建白書)’이다. 이 상소문에서 봉건적인 신분제도의 철폐, 근대적인 법치국가의 확립에 의한 조선의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주장하였다. 여기에 그의 개화정치에 대한 이상이 설계되어 있으며, 그뒤 그가 시행한 개혁정치는 그것의 실천이었다고 볼 수 있다.
1893년말 후쿠자와(福澤諭吉) 등 일본 조야(朝野)의 유력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동경에 친린의숙(親隣義塾)이라는 사립학교를 세워 유학생들의 교육에 힘을 썼다. 이때 조선정부의 밀명을 맡고 이일직(李逸稙) 등이 박영효를 암살하고자 친린의숙에 잠입하였으나 미수에 그쳤다.

5. 귀국 후의 정치활동
1894년 봄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계기로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정부의 주선으로 그해 8월 귀국하였다. 그뒤 조선정부에 친일세력을 부식하려는 일본공사 이노우에(井上馨)의 지원을 받아 수립된 제2차 김홍집내각의 내부대신으로 입각하였다.
1895년 삼국간섭으로 일본세력이 퇴조하자 불안을 느껴 이노우에의 권고를 무시하고 김홍집파를 내각에서 퇴진시킨 뒤 독자적으로 제2차갑오개혁을 추진하였다. 이 시기에 중점적으로 추진하였던 개혁은 근대적인 내각제도의 도입, 지방제도의 개편, 새로운 경찰‧군사제도의 확립 등이었다. 이러한 개혁을 통하여 조선의 부국강병을 도모하는 한편, 자신의 권력기반을 공고히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왕실과 이노우에공사로부터 배척당하고 1895년 7월 역모를 음모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뒤 상소를 통하여 자신의 역모 혐의의 부당함을 고종에게 호소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1898년에 접어들면서 독립협회(獨立協會)가 강력한 정치단체로 부상함에 따라 본국에 이규완(李圭完)‧황철(黃鐵)‧이정길(李鄭吉) 등의 심복을 밀파하여 독립협회와의 제휴를 통한 자신의 정계복귀를 기도하였다. 그 결과 독립협회의 신진소장파가 중심이 되어 그의 소환서용운동(召喚敍用運動)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고종과 수구파대신들은 오히려 이를 구실로 독립협회를 해산시켜버렸다. 이렇게 되자 1900년 7월 본국에 밀파되어 있던 이규완일행에게 의화군(義和君) 강(堈)을 국왕으로 추대하기 위한 쿠데타 음모를 지시하였다. 그러나 이 음모도 사전에 발각됨으로써 그의 정계복귀공작은 실패로 돌아갔고, 궐석재판결과 교수형이 선고되었다. 
1907년 비공식으로 귀국하여 부산에 체류하다가 상경, 궁내부고문 가토(加藤增雄)와 접촉, 공작하여 고종의 특사조칙(特赦詔勅)을 제수받았을 뿐 아니라 성대한 환영식과 연회로 정계복귀를 할 수 있었다. 이어 헤이그특사사건을 계기로 궁내부대신에 임명되어, 통감 이토(伊藤博文)와 이완용(李完用)내각의 고종 양위압력을 무마시키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순종이 즉위한 뒤 군부(軍部)내의 반양위파(反讓位派)와 통모, 고종의 양위에 찬성한 정부대신들을 암살하려 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1년간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6. 합방 후의 행적
국권이 늑탈된 뒤 일제가 회유정책의 일환으로 수여한 후작의 작위를 받았으며, 1911년 조선귀족회회장, 1918년 조선은행이사를 역임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난 뒤 일제의 이른바 문화통치에 순응하여 유민회(維民會)‧동광회(同光會)‧조선구락부(朝鮮俱樂部)‧민우회(民友會) 등 친일 내지 개량주의적 단체와 관계를 맺는 한편, 1920년 동아일보사 초대사장에 취임하였다. 1926년 중추원의장, 1932년 일본귀족원의원을 지냈으며, 1939년 중추원부의장 재직중 죽었다. 저서로 《사화기략(使和記略)》이 있다.<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 모란공원묘지 안에 있는 박영효 묘..   

현대인들 묘역을 둘러볼때는 선현들 묘와는 많이 다르다. 느낌도 다르고 평가도 다르고... 어떤 때는 옛 사람들의 행동이 존경스러울 때도 있다. 예전에는 돌아가신 뒤 한 두 세대쯤 뒤 손자대에 가서야 묘비나 신도비를 세웠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고인에 대한 평가가 그때쯤이면 거의 결론이 나기 마련이다. 당대에 평가를 했어도 몇년 뒤에 뒤집어질 수 있음을 선조들은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은 돌아가신 바로 그 다음날 묘비부터 근사한 것으로 세운다. 어느 것이 좋은 것인지... 아직은 말을 줄여서 해야할 처지인지라...

▼ 박영효 묘 근경

▼ 박영효 묘 앞에 묘비가 세워져 있는데 앞면은 태극기 제작 내력이 적혀있다. 뒷면에 경력이 적혀 있는데.... 1895년 이후의 행적은 생략되어있다.

▼ 박영효 묘 측면...

▼ 박영효 묘... 묘비인데 누워있으니 뭐라 표현해야할지 모르겠다. 아무튼 묘비...  

 


장기려(張起呂)

 
1911년 8월 14일~1995년 12월 25일. 현대 의학자‧사회사업가. 호는 성산(聖山)이다. 출신지는 평안북도 용천(龍川)이다. 부친 장운섭과 모친 최윤경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외과의사 백인제 박사의 제자로서 수련하였다.
송도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경성의학전문대학을 졸업한 후 나고야대학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2년 경성의학전문학교 외과에 있다가 1940년 평양연합기독병원으로 옮겨 근무하였으며, 1945년 평양도립병원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1947년 평양의과대학 외과 교수로 근무하였으며, 1953년 서울대학교 외과 교수가 되었다. 이 외에도 부산대학교‧서울가톨릭의과대학‧부산복음간호전문대학의 교수를 겸임하였다.
1974년 한국간연구회 초대회장을 시작으로, 한국청십자사회복지회 대표이사(1976)‧인제대학교 의과대학 부속 부산백병원 명예원장(1979)‧한국장애자재활협회 부산지부장(1985)‧한국청십자사회복지회 명예 대표이사(1993) 등을 역임하였다.
보건의 날 공로상(1960)‧대한의학협회 학술상(1961)‧국민훈장 동백장(1976)‧인도장 금상(1978)‧국민훈장 무궁화장(1996) 등을 받았으며 2006년에는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수많은 의료봉사활동을 펼쳤고, ‘복음병원’이라는 행려(行旅) 병자를 위한 무료 의료시설을 세워 ‘한국의 슈바이처’라는 별칭을 얻었다. 또한 뇌전증 환자 치료모임인 ‘장미회’를 설립하여 치료에 정성을 다하였다.
친필 회고록인 《이 걸음 이대로》가 2011년 발간되었고, 그의 삶을 다룬 뮤지컬이 제작되는 등 그의 연구와 희생적인 삶에 대해 오래도록 회자되고 있다.<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 유명인들의 묘소 위치 확인을 위해 방문한 관리사무소 앞 조각..

▼ 관리사무소에서 알아낸 위치로 쉽게 찾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어렵게 찾은 장기려 선생 묘

▼ 장기려선생 묘비 전면과 후면

▼ 장기려선생 묘.. 돌로 완전히 둘러 쌓여있다.

▼ 장기려선생 묘 전경

 

작곡가 박춘석(朴椿石)

 

서울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음악을 익혔고, 고등학교 재학 시절부터 피아노 연주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55년에 정식으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해 작곡가로 데뷔했고, 자신의 곡에 직접 가사를 붙여 작사 활동도 병행했다. 약 40년 동안 작품을 발표하면서 수많은 인기곡을 탄생시켰고, 이미자ㆍ패티김ㆍ남진 등 스타 가수를 양성했다.
본명은 박의병이며,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피아노 연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 입학했으나 곧 중퇴했다고 하며, 현재 확인되는 최초의 활동 기록은 1949년 서울스윙킹밴드 참여이다. 1955년에 「황혼의 엘레지」 등을 발표한 이후 오아시스레코드ㆍ지구레코드ㆍ대도레코드 등에서 전속 작곡가로 활동했고, 1980년대 이후로는 태양음향ㆍ거성레코드 등을 직접 설립해 운영하기도 했다. 1987년에 한국음악저작권협회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1990년대 들어서까지 계속 새로운 작품을 발표했으나, 1994년에 뇌졸중이 발병한 이후로는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투병하다가 2010년에 타계했다.
작곡가로서 입지를 굳힌 작품은 1956년에 발표한 「비 내리는 호남선」이다. 작곡 외에 백호라는 필명도 사용하며 작사 활동을 병행했고, 외국 대중음악 편곡에도 능해 번안곡 「검은 상처의 블루스」 등을 히트시켰다. 피아노 연주가로 1950년대 재즈 보급에 기여했고,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까지는 자신의 이름을 건 악단을 이끌며 밴드마스터로도 이름을 날렸다. 1966년에는 10년가량 전속으로 있던 오아시스레코드를 떠나 경쟁사인 지구레코드로 옮겼는데, 이때부터 이른바 ‘박춘석 사단’이 형성되기 시작해 작곡가로서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가수 이미자ㆍ남진ㆍ문주란ㆍ하춘화 등으로 대표되는 박춘석 사단의 활동에 따라, 재즈 피아노 연주로 시작된 박춘석의 음악 활동 영역은 「섬마을 선생님」이나 「가슴 아프게」 등 트로트로까지 대폭 확장되었다. 음악의 다양성과 예술성 면에서 당대 다른 어떤 대중가요 작곡가보다도 뛰어났으며, 패티김이 부른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같은 곡은 박춘석 음악의 폭과 깊이를 확인시켜 준 작품으로 꼽힌다.
1995년에 옥관문화훈장을 받았고, 2010년 사후에 은관문화훈장을 추서 받았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작곡가 박춘석 묘

▼ 수많은 히트곡을 남긴 박춘석 묘비..

▼ 박춘석 묘비 뒷면

▼ 박춘석 묘 전경

▼ 박춘석 묘 후경... 작은 연못가에 묘역이 위치해 있다.

 


피천득(皮千得)

 
1910년 5월 29일~2007년 5월 25일. 현대 수필가‧시인‧영문학자. 호는 금아(琴兒)이다. 출신지는 서울이다. 부인은 임진호이다.
1919년 서울 제일고등보통학교 부속초등학교에 입학하였고, 1923년 서울 제일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다. 1926년 중국 상하이로 유학 가서 토마스 한버리 공립학교(Thomas Hanbury Public School)에서 수학하였고, 1929년 상해 호강대학교 예과에 입학하였으며, 2년 후 같은 대학 영문학과에 진학하여 1937년 졸업하였다. 그 후 서울 중앙상업학원에서 교원으로 재직하였다.
경성대학교 예과 교수(1945~1946),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 서울대학교 대학원 영어영문학과 주임교수(1963~ 1968) 등을 역임하고, 1974년 서울대학교 교수직에서 물러났다.
1930년 《신동아》에 시 ‘서정소곡’, ‘소곡’, ‘파이프’ 등을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주요 저서로 수필집 《인연》‧《은전 한 닢》, 시집 《생명》‧《서정소곡》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 《내가 사랑하는 시》‧《셰익스피어 소네트 시집》이 있다.
상훈으로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문화훈장 은관장(1991), 인촌상 문학부문(1995), 제9회 자랑스런 서울대인상(1999) 등을 받았다. 향년 98세로 세상을 떠났고, 슬하에 2남 1녀가 있다.<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 입구쪽 구석진 곳에 피천득선생 묘가 있다...

▼ 피천득선생 묘 전경 

▼ 피천득선생 묘비..  

 

▼ 피천득선생 묘 옆에는 특이한 묘비가 있다.. 조각가 김정숙 묘

 

 

▼ 피천득선생 묘 백호쪽 우측에는 합죽이로 더 알려진 코메디언 김희갑씨 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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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