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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산(逍遙山) 자재암(自在庵)

 

소요산 자재암을 다녀왔는데 예전에 올린 글이 있나 봤더니 2010년 단풍축제 때 소요산을 한바퀴 완등한 기록이 보인다. 그냥 등산하면서 찍은 사진을 올렸는데 오히려 단순하면서 신선해 보인다. 지금은 답사기 하나를 올리기 위해서 여러 문헌들을 찾아보고 근거를 명시하면서 올리다보니 좀 복잡해지고 그러다보니 글을 올리는 것도 부담으로 작용해서 많은 곳을 다녀왔는데도 못 올리고 시간을 보내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감상문 식으로 글을 자연스럽게 올려야 편해서 좋은데 예전식으로 글을 편하게 올리는 방법을 다시한번 생각해 봐야 할것 같다.

소요산은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전설이 다른 어떤 곳보다 많은 곳이다. 자재암을 원효대사까 개설했다 하고 인근의 많은 지명, 폭포, 굴 등이 원효와 연관되어 있다. 어찌보면 작은 암자에 불과한 곳인데 등산객을 포함해 많은 분들이 소요산 자재암을 찾고 기도를 드리고 있다. 나도 개인적으로 여러번 찾은 암자이기도 하다.

이곳은 터가 너무 좁아서 큰 절이 들어서기도 힘든 곳인데 암자 끝에 나한굴이 있고 그 앞에 원효샘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기도효험을 얻고 찾아오는 절로 알려져 있다. 요즘엔 어느 절에 가더라도 촛불 하나는 밝히고 간절한 소원을 적어 불전 앞에 올린다. 다녀와서 이런 답사기를 써야해서 본의 아니게 사진을 찍어야 해서 조금은 죄송한 마음이 들지만 마음만은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다. 

예전에는 자재암을 거쳐 소요산을 당연히 올라가는 일정으로 잡았겠지만 지금은 자재암까지만 가는 거로 일정을 잡으니 시간이 흐르면서 나도 많이 변했고 몸도 힘들고 어떤 마음가짐도 많이 변화되는걸 느낀다. 자재암에 도착하니 주위에 미군들이 자주 눈에 띄었는데 그들은 반바지에 반팔차림으로 씩씩하게 오르는걸 보니 젊은 사람들의 모습에서 지나 시간을 되새겨 보게 된다. 그런가하면 소요산 입구 쪽에는 왠 노인분들이 짝을 이뤄 생각보다 많이 밴치를 차지하고 앉아있다. 무슨 일인가 생각해보니 예전에 천안까지 지하철이 연장되면서 노인분들이 소일하면서 온양온천 가신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났는데 지금 소요산까지 전철이 오니 노인분들이 소일로 오는게 아닌가 생각든다. 이런 것도 하나의 트랜드라고 생각하니 세월이 참으로 무섭게 느껴진다. 아름다운 산천을 주유하면서 인생의 아름다운 모습을 기대한다.

  

소요산 완등 답사기 바로가기

 

 

소요산(逍遙山)
 
소요산(逍遙山)은 경기도 동두천시에 있는 해발 고도 536m의 산이다. 산세가 수려해 경기의 소금강이라고도 불린다. 645년, 신라고승 원효가 세운 자재암이 있다. 단풍으로 유명한 산이며, 1981년에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다. 화담 서경덕, 봉래 양사언과 매월당 김시습이 자주 소요하였다 하여 '소요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2002년 세계 산의 해를 기념하여 산림청이 선정한 한국 100명산 중 한 곳이다. 또한 한국의 산하 인기 명산 100산 중에서 38위에 올라 있을 정도로 지명도가 높다.
추가령에서 이어진 광주산맥의 동쪽에는 소요산(逍遙山, 536m)·국사봉(國師峰, 754m)·왕방산(旺方山, 737m)이 포천시와, 서쪽에는 마차산(馬車山, 588m)이 양주시와, 남쪽에는 칠봉산(七峰山, 506m)·해룡산(海龍山, 661m)이 양주시·포천시와 경계를 각각 이루고 있다.
소요산에는 자재암을 비롯 원효대굴, 공주봉 등 원효대사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소요산 입구에서 계곡을 따라 800m쯤 올라가면 층암절벽 사이로 쏟아지는 원효폭포를 만나게 된다. 원효대사가 폭포 오른쪽 석등에 앉아 고행수도를 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원효폭포 부근에는 향토유적 제8호이자 유서깊은 암자인 자재암이 자리하고 있다.
소요산의 주봉은 의상대다. 등산 코스는 능선을 따라 하백운대~중백운대~상백운대~의상대~공주봉으로 이어진다. 능선을 종주하는 데 6시간 정도 걸린다. 자재암을 지나면 하백운대가 나온다. 하백운대에서 중백운대까지는 가파른 암릉이다. 중백운대에는 옥로봉, 관음봉, 이필봉 등 기묘한 봉우리들이 솟아 있다. 옥로봉 밑의 대암굴에는 약수터가 있다.<위키백과에서 인용>

 

▼ 소요산(逍遙山) 입구 조형물...

▼ 소요산(逍遙山) 입구 조형물...

▼ 소요산(逍遙山) 입구의 반공희생자위령탑과 독립유공자추모비...

▼ 소요산(逍遙山) 등산로... 예전에는 크게 한바퀴 돌고 왔는데 이번에는 자재암까지만 다녀왔다.ㅎ

 

소요산(逍遙山) 자재암(自在庵)
 
자재암(自在庵)은『봉선본말사지(奉先本末寺誌)』「자재암(自在庵)」조에 의하면 654년(신라 무열왕 1년) 원효 스님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그 후의 연혁은 알 수 없으나, 전하는 바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974년(광종 25년) 각규대사(覺圭大師)가 태조의 명으로 중창하고 소요사라 했다. 그리고 1153년(의종 7년)에는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이듬해 각령(覺玲)이 대웅전과 요사만을 복구하여 명맥만 이어왔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사찰에 대한 구체적인 연혁이 전하지는 않으나 『세종실록(世宗實錄)』지리지 경기 양주도호부 소요사(逍遙寺) 조에 태조의 원당으로 하고 밭 1백 50결을 하사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범우고(梵宇攷)에 있는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년)의 시에 소요사가 언급되고 있으나 페허가 되었다고 했다. 이로보아 조선 초까지만 해도 자재암은 태조의 원당으로 왕실의 비호를 받아오다가 어느 시기엔가 폐허가 되다시피 하여 겨우 명맥만 유지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조선후기 들어서는 1872년(고종 9년) 원공(元空)과 제암(濟庵) 스님이 퇴락한 자재암을 중창하고 영원사(靈源寺)라 하였다. 이때의 일은 설화같이『소요산영원사중건기(逍遙山靈源寺重建記)』에 전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원공(元空)과 제암(濟庵) 스님은 같은 꿈을 꾸고 만나 영산전ㆍ만월보전ㆍ독성각ㆍ산신각ㆍ별원(別院) 등 모두 44칸을 중창 하였다고 한다.
1907년에는 화재로 만월보전을 제외하고 모두 소실되었다. 그 후 1909년 성파(性坡)스님과 제암 스님이 다시 중창하고 절 이름을 자재암으로 고쳤다. 이러한 내용은『자재암재차중건기(自在庵再次重建記)』에 자세히 전하고 있다.
근세에 들어 한국전쟁 당시 다시 소실된 것을 1961년 진정(眞精) 스님이 대웅전을, 1968년 성각(性覺) 스님이 요사채를, 1977년에는 삼성각을, 1982년에는 일주문을 각각 지었다. 이어 1984년에는 동두천 시내에 부설 연화유치원(현)이 개원하였고, 1983~1985년에 오래된 건물을 헐고 새로운 중창을 하여 지금의 사격을 갖추었다.<자재암 홈페이지>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년)
 
신라시대의 고승으로, 속성은 설씨(薛氏), 원효는 법명이며, 아명은 서당(誓幢)이다.
648년 황룡사에서 출가한 뒤 각종 불전을 섭렵하며 수행에 정진하였다. 일정한 스승을 모시고 경전을 공부하지 않고 타고난 총명으로 널리 전적(典籍)을 섭렵하여 한국불교사에 길이 남는 최대의 학자이자 사상가가 되었다. 34세에 의상(義湘)과 함께 당나라로 가던 중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 "진리는 결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터득하고 의상과 헤어져서 돌아왔다.
이후 태종무열왕의 둘째딸인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낳았는데 이후 스스로 복성거사(卜性居士) 소성거사(小性居士)라고 칭하고 속인행세를 하였다. 현존하는 그의 저술은 20부 22권이 있으며 특히 그의<대승기신론>은 중국 고승들이 해동소(海東疏)라 하여 즐겨 인용하였고, <금강삼매경론>은 인도의 마명(馬鳴) 용수 등과 같은 고승이 아니고는 얻기 힘든 논(論)이라는 명칭을 받은 저작으로서 그의 세계관을 알 수 있는 큰 저술이다.
그는 학승으로서 높이 평가될 뿐만 아니라 민중 교화승으로서 당시 왕실 중심의 귀족화된 불교를 민중불교로 바꾸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또한 종파주위적인 방향으로 달리던 불교이론을 고차원적인 입장에서 회통시키려하였는데 그것을 오늘날 원효의 화쟁사상(和諍思想)이라 부르며, 이것은 그의 일심사상(一心思想) 또는 무애사상(無埃思想)과 함께 원효사상을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자재암 홈페이지>

 

문화재지정 전통사찰 제80호, 향토유적 제8호
문화재명칭 소요산(逍遙山) 자재암(自在庵)
소재지 경기도 동두천시 평화로2910번길 406-65, 자재암(상봉암동)
관리자(연락처) 대한불교조계종 소요산(逍遙山) 자재암(自在庵)

 

▼ 소요산(逍遙山) 자재암 일주문(自在庵 一柱門)과 편액(扁額)
정면 1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1982년에 건립한 것이다. 정면에는「소요산자재암(逍遙山自在庵)」「경기소금강(京畿小金剛)」이라는 편액 두 개가 걸려있다.

▼ 소요산(逍遙山) 자재암(自在庵) 안내판... 한쪽이 무너져 내린다.

▼ 소요산(逍遙山)은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이야기로 가득하다.

▼ 소요산(逍遙山) 자재암(自在庵) 오르는 길에 만나는 원효폭포와 원효굴... 여름에는 제법 많은 물이 흘러내리는데 지금은 갈수기라 물이 거의 말라있다. 위쪽에 원효대가 보인다.

▼ 소요산(逍遙山) 원효폭포

▼ 소요산(逍遙山) 원효굴에 모셔진 극락삼존과 사천왕상...

▼ 소요산(逍遙山) 자재암(自在庵) 오르는 길은 백팔계단으로 이뤄져서 한계단 한계단이 의미가 있다.

▼ 예전에 해탈문이 있던 자리에 금강문을 세워 놓았다.

▼ 금강문 들어서면 왼편에 원효대사가 수행했다는 원효대가 있다. 

▼ 원효대에서 바라본 자재암(自在庵) 일주문 방향... 계곡 끝이 소요산 입구이다.

▼ 소요산(逍遙山) 자재암(自在庵) 유래 안내판

▼ 소요산(逍遙山) 자재암(自在庵) 전경

 

자재암 대웅전(自在庵 大雄殿)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1961년 진정(眞靜) 스님이 불사하여 지은 것이다. 건물의 정면에는 대웅전(大雄殿)이란 편액과 4점의 주련이 걸려 있는데, 주련은『대지도론(大智度論)』권4와『치문경훈(緇門警訓)』권10「찬불사불게(讚佛沙弗偈)」등에 나오는 구절로 다음과 같다.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 하늘과 땅 사이에 부처님 같으신 분 없으시니
시방세계역무비(十方世界亦無比) 시방세계에 비할 이 없네.
세간소유아진견(世間所有我盡見) 세간에 있는 모든 것 다 보았으나
일체무유여불자(一切無有如佛者) 모두가 부처님 같으신 분 없네.

이외에 건물의 외벽에는 산수도를 그려 장엄하였고, 중앙 어간 기둥 위와 모서리 기둥위에 올려놓은 용머리 모양의 안초공이 이채롭다. 귀공포는 현대적인 감각을 유지하고 있다.
법당 내부에 모셔진 존상으로는 ‘석가여래좌상’과 ‘관음보살좌상’, ‘대세지보살좌상’, ‘지장보살좌상’, ‘위태천입상’이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불화로는 1991년에 조성한 <삼세불후불탱>과 <지장시왕탱>, 1992년에 조성한 <신중탱>이 봉안되어 있다. 이외에 1977년 조성한 범종이 하나 있다.<자재암 홈페이지>

 

▼ 소요산(逍遙山) 자재암(自在庵) 대웅전

▼ 소요산(逍遙山) 자재암(自在庵) 대웅전 근경

 

금강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般若波羅蜜多心經略疏) : 보물 제1211호
 
오래 전에 답사를 한 묘역인데 못 보고 묘만 보고이 책은 당나라 현장(玄?) 스님이 번역한『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에 송나라의 중희(仲希)가 자신이 지은『현정기』를 붙여 다시 편찬한 것으로, 『반야심경소현정기』라 부르기도 한다. 목판에 새긴 후 닥종이에 찍어낸 것으로, 세로 31㎝, 가로 19.1㎝의 크기이다.
책머리에는 금강경의 전문(箋文:글의 뜻을 해명하거나 자기의 의견 등을 적어서 그 책에 붙이는 작은 쪽지)인 금강경심경전(金剛經心經箋)이 붙어 있다. 전문에 의하면 금강경은 1464(조선 세조 10년) 간경도감(刊經都監 : 불경을 한글로 풀이하여 간행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에서 간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책 말미에는 1464년 효령대군과 한계희 등이 왕명을 받아 간경도감에서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판본은 현재 보물 제 771호로 지정된 서울대학교 도서관본과 동일한 본이나, 이곳에 없는 전이 붙어 있고 교정인이 찍혀 있으며 보전상태는 서울대학교 본보다 양호하다. 불교문화재로서 뿐만 아니라 서지학적으로도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자재암 홈페이지>

 

▼ 소요산(逍遙山) 자재암(自在庵) 금강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般若波羅蜜多心經略疏) : 보물 제1211호, 사진은 자재암 홈페이지 인용

▼ 소요산(逍遙山) 자재암(自在庵) 나한전과 독성암, 옥류폭포...

▼ 소요산(逍遙山) 자재암(自在庵) 나한전 원경

▼ 소요산(逍遙山) 자재암(自在庵) 나한전

▼ 소요산(逍遙山) 자재암(自在庵) 나한전 내부...

▼ 소요산(逍遙山) 자재암 나한전불사기 비(自在庵 羅漢殿佛事記碑)
1980년 조성한 나한전의 불사를 기념하여 1981년 세운 비석으로 비문은 이종익(李鍾益)이 짓고, 김응현(金應顯)이 썼다. 비문에는 자재암의 내력과 함께 나한전 불사의 시주자가 기록되어 있다.

 

원효샘(元曉井)에 얽힌 이야기
 
신라의 고승이었던 원효대사가 나이 서른이 넘어 소요산에 머물며 수행을 쌓았다. 그 분의 덕행은 차츰 온 마을에 퍼지게 되어 많은 사람들이 소요산에 모여들기 시작 하였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가자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은 부족한 식수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요산은 돌산으로 마땅한 샘터를 찾기가 어려웠다. 모두들 걱정만 하고 있던 차에, 하루는 선정에 들어 지맥(地脈)을 관찰하다 바위 사이로 깨끗한 물줄기가 흐르고 있음을 발견한 원효대사는 바위틈을 꿰뚫어 깨끗한 물이 흐르게 하였다.
그 이후 신기하게도 이 물을 마신 사람들의 속병이나 갖가지 위장병이 치료되었다고 한다. 원효대사(元曉大師)가 만든 우물이라 하여 '원효정(元曉井)'이라 불리었던 것이 각지에 만병통치의 약물로 소문이 퍼져 특히 음력 3월 3일 삼짓날에는 물을 마시러오는 사람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더욱 놀랄 만한 것은 이 물은 아무리 가물어도 그 물줄기가 그치지 않고 계속 되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상주승려(常住僧侶)가 수행에 어긋날 때에는 물이 조금씩밖에 나오질 않았다 한다. 또한 마음속에 음흉한 생각을 조금이라도 품고 있는 사람들이나, 몸이 청결하지 못하다든지 육류를 즐기는 사람이 몸을 불결하게 하고 물을 마시려 하면 실 그림자 같은 벌레가 꿈틀거리고 있어 끝내는 물을 마시지 못하고 돌아서야만 한다.<자재암 홈페이지>

 

▼ 소요산(逍遙山) 자재암(自在庵) 원효샘... 이규보가 '젖처럼 맛있는 차가운 물'이라고 감탄했다 한다.

▼ 자재암 삼성각(自在庵 三聖閣)
원래 이 자리에는 1967년 4월 문성준(文聲準) 스님이 중건한 산신각이 있었다. 그러나 내부가 너무 좁아서 1977년 법조(法照) 스님이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확장하고 삼성각이라 하였다. 삼성각 안에는 자재암의 탱화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1914년 무렵에 조성한 칠성탱과 근래에 조성한 독성탱, 산신탱, 그리고 독성상과 산신상이 봉안되어 있다.

현재는 공사중으로 삼성각에 모셔진 탱화는 계단 아래쪽에 임시로 모셔져 있어서 참배는 가능하다.

추담대종사사리탑과 탑비(秋潭大宗師舍利塔과 塔碑)
 
현대의 고승으로 말년에 이곳 주지로 주석하면서 중창불사를 하여 지금의 자재암이 있게 한 추담(秋潭, 1898~1978)스님의 사리탑과 탑비이다. 스님은 조선말기인 1898년 9월 13일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함흥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4년 26세에 함경남도 함주군 설봉산에 있는 귀주사(歸州寺)로 출가를 하였고, 금산사 주지를 비롯하여 전등사, 법주사, 신흥사 주지를 거쳐 말년에는 소요산 자재암에 머물다가 1978년 입적하였다.
이러한 스님의 업적을 기려 1982년 스님의 사리탑과 탑비를 스님의 법제자(法資)인 법타(法陀) 스님께서 세웠다.<자재암 홈페이지>

 

▼ 소요산(逍遙山) 자재암(自在庵) 금강문에서 바라본 백운암과 추담대종사 사리탑과 탑비

▼ 소요산(逍遙山) 자재암(自在庵) 추담대종사사리탑과 탑비(秋潭大宗師舍利塔과 塔碑)

▼ 자재암 백운암(自在庵 白雲庵)
추담대종사사리탑 우측 위쪽으로 자리한 건물로 자재암의 선방(요사채)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으로 잘 쌓여진 높다란 석축 위에 1961년 중창 때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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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