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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4남 신성군(信城君)

 

예전 남양주 묘지답사를 후배와 할 때 신성군 묘를 찾다 헤매었는데 그때는 결국 못 찾고 말았다. 그 이후에 위치는 확인했는데 시간이 별로 안 나서 미루고 있다가 엊그제 진접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4시경 짬이 나서 신성군 묘를 찾았다.신성군 묘는 네비로 치고가면 길이 막혀 더 이상 갈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인근에 있는 봉영사에 주차하고 걸어 다녀왔다. 이곳은 최근에 후손들이 외부인들 못 들어 오게 철조망으로 막아 놓았다. 그런데 어떤 분들이 작은 통로를 만들어 놓아서 한 몸 조심스럽게 들어갈 수는 있었다. 신성군은 선조와 인빈김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인빈김씨의 셋째아들이 바로 정원군인데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이 바로 인조가 된다. 인조가 왕이 되어 자기 아버지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대해서 할머니인 인빈김씨가 왕의 사친이 되니 바로 옆 산에 모셔진 순강원이다. 즉 신성군은 어머니 인빈김씨 발치에 묻혀 있게 된 것이다. 신성군은 한 때 선조가 세자로 삼으려 했을 정도인데 안타깝게도 임진왜란 중 의주에서 사망하여 그곳에 안장했다가 옮겨왔는데 묘비 뒷면을 보니 10년 후인 임인년(1602년)8월에 이장한 것으로 되어 있다. 천견산에서 내려오는 맥을 잘 받고 있으며 좌우 사신사도 잘 짜여져 있다. 최근에 후손들 묘를 그 위쪽에 올렸는데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선조4남 신성군(信城君)
 
신성군 이후(信城君 李珝, 1579년 1월 6일/1578년 음력 12월 10일 ~ 1592년 12월 8일/음력 11월 5일)는 조선 중기의 왕족 종실이자 선조의 넷째아들(인빈 김씨 소생)이며 오강군 이건의 양자이다.복성군의 사후 양자로 내정되었던 아버지 하성군이 명종에게 후계자로 지명되어 입승대통하면서 오강군 이건이 사후양자가 되었다. 그는 생전 선조의 후계자로 낙점되었지만 일찍 요절했다. 사후 선조의 명으로 복성군의 사후 양손자가 되었다.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고종 때 가서 충정(忠貞)의 시호가 추서되었다.1579년 1월 6일(1578년 음력 12월 10일) 탄생하였다. 어머니인 인빈 김씨가 선조의 총애를 받을 당시에 태어나 선조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한때 선조는 광해군 대신 그를 세자로 세우려 했으나 이해수(李海壽), 정철 등 중신들의 반대로 실패했다.명종은 복성군 미의 후사로 덕흥군의 3남 하성군 균을 세웠었다. 그러나 하성군이 명종의 후계자가 되어 왕이 되자, 선조는 다시 복성군의 후사로 오강군을 지명했다가 오강군도 자녀가 없자, 일찍 죽은 신성군을 입양하였다.선조는 후궁 공빈 김씨와 인빈 김씨를 총애했는데, 공빈 김씨가 먼저 죽자 선조는 인빈의 아들인 신성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다. 1591년(선조 24) 정철과 유성룡, 이산해가 세자를 정할 것을 건의하기로 해놓았다. 그러나 서인에게 원한을 품은 이산해가 인빈 김씨의 남동생 김공량(金公諒)을 통하여, 서인이자 좌의정인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정하여 신성군을 모해하려고 한다고 인빈 김씨에게 고하게 하여 정철 등 서인을 몰아낸 건저의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때 신성군이 거론되었다. 선조는 내심 신성군을 세자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발발로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삼는 현실적인 선택을 하였다.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발발로 도성이 위급해지자 종묘와 사직의 위패를 모신 종묘 관원과 어가를 따라 평양으로 피난했고, 같은 해 5월 3일 정원군, 기성부원군 유홍, 이조참판 이항복과 함께 성지(城池)를 수리를 하고, 평양성 사수와 평안도 병사 모집을 위해 먼저 평양으로 떠났다.이해 5월 29일 왜군이 임진강을 건넜다는 보고를 받고 그는 구사맹, 신잡 등의 호위를 받아 평안도 영변으로 갔다. 이해 12월 8일(음력 11월 5일) 다시 의주로 피난가던 중에 갑자기 향년 15세로 병사하였다. 시신은 임시로 의주에 안장되었다.1600년(선조 33) 1월 12일 비망기로 정원에 전교하여 신성군의 묘를 의주에서 옮겨오도록 하고, 전쟁이 끝나고 6년 뒤인 1604년(선조 37) 6월 25일 충근정량효절협책호성공신(忠勤貞亮效節協策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그러나 그의 공신 영정은 실전되었다.선조는 그를 총애하여 세자로 세우려 했지만 일찍 죽어 결국 복성군의 양손자로 입양시켰다. 대신 신성군의 양자를 세웠다. 1607년(선조 40) 6월 10일 신성군에게 아들이 없어 정원군의 셋째 아들 능창대군 이전을 후사로 삼으라고 비망기로 좌승지 이선복에게 전교하길, "신성군 이후는 생전에 복성군 이미의 양자 오강군 이건에게 출계(出系)하여 복성군(福城君)의 제사를 받들었으니, 인빈(仁嬪)의 봉사(奉祀)는 정원군(定遠君) 이부(李琈)가 할 것으로 예조에 말하라. 신성군 이후에게 아들이 없으니 정원군의 세째 아들 이전(李佺)을 계후(繼後)시킬 것으로 예조에 말하라." 하였다.1615년(광해군 8) 11월 17일 능창대군이 신경희의 옥사에 무고를 당해 교동(喬桐)에 안치되어 갖은 곤욕을 받았다가 결국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하여 1630년(인조 8년) 인조의 명으로 다시 사후양자를 간택하여 그해 5월 7일 다시 선조의 아홉째 서자인 경창군의 3남 평운군 이구(平雲君 李俅)를 후사(後嗣)로 삼았다.한편 그의 양아버지 오강군 이건은 자신의 형 서천군 이금의 서자 철원부수 의남을 양자로 삼았다가 김세렴에게 탄핵당하기도 했고, 신성군의 양자로 지명된 평운군의 후손들은 20세기까지도 오강군을 선조로 인정하지 않고, 복성군 계후 신성군으로 족보에 올리기도 했다. 1871년(고종 8) 3월 16일 시호는 충정(忠貞)에 추증하였다.<위키백과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미지정
문화재명칭
선조4남 신성군(信城君) 묘
소재지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 산8-7
관리자(연락처)
전주이씨

 

 

▼ 선조4남 신성군(信城君) 묘 3D 위성도

 

 

▼ 신성군(信城君) 묘 원경

 

 

신성군(信城君) 묘 전경

 

 

신성군(信城君) 묘 

 

 

신성군(信城君) 묘 ... 묘역의 나무들이 빼곡하여 그늘이 진다. 오후에 찾아서 이만하지 오전이면 어둑하니 그늘 졌을 것이다.

 

 

신성군(信城君) 묘 근경

 

 

신성군(信城君) 묘표... 배위 영풍군부인 신씨는 신립장군 따님이다.

 

 

신성군(信城君) 묘표 후면

 

 

신성군(信城君) 묘 장명등...

 

 

신성군(信城君) 묘 청룡쪽 석물...

 

 

신성군(信城君) 묘 백호쪽 석물...

 

 

신성군(信城君) 묘 석물들...

 

 

 

 

 

신성군(信城君) 묘 측경...

 

 

 

신성군(信城君) 묘역은 좁은데 석물을 정상적으로 배치하여 상당히 많아 보인다. 

 

 

신성군(信城君) 묘

 

 

 

 

신성군(信城君) 묘 봉분은 위쪽이 흘러내리고 있다. 

 

 

 

신성군(信城君) 묘 후경... 겨울인데도  앞쪽이 잘 안보인다. 앞쪽 소나무를 베어내야 묘역이 양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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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