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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천재(山天齋), 덕천서원(德川書院)

 

산청 조식 유적(山淸曺植遺蹟) 답사는 우선은 서울에서 거리가 멀고 당일로는 힘들기 때문에 다른 곳과 연계해서 다녀와야 하는데 보통은 함양, 거창과 어울려서 다녀오게 된다. 

특히 조식 유적지는 산청에서도 끝에 있어서 그곳을 답사하고는 다시 가던 길을 되돌아 나오다보니 동선 잡기가 조금은 힘들다.

이번에도 새벽에 서울을 출발하여 함양, 산청을 다녀오다보니 마음은 급하고 소나기는 쏟아지고 또한 코로나로 문 닫은 곳이 많아서 뜻한대로 답사가 이뤄지진 못했다. 그래도 태풍과 코로나로 정신 없는 와중에 다녀온 곳이라 남다른 의미가 있는 곳이다.

산천재는 남명선생이 환갑 때 이곳 지리산이 보이는 산청으로 와서 후학을 양성하며 노년을 보낸 곳이다. 이곳에서 말년에 선조의 부름을 대신해 무진봉사 상소를 쓴 곳이리라.

덕천서원은 후학들이 남명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세웠는데 광해군 때 북학파가 득세하면서 남명선생도 크게 추앙되어 문정이라는 시호도 받고 서원 세곳도 모두 사액을 받았다. 이때가 남명학파의 최대 전성기가 아닌가 싶다. 

 

산천재(山天齋)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사리에 위치하며 이곳은 남명 조식이 생의 후반부를 보내며 살았던 곳이다. 그는 61세 때 산청 지역에 정착하여 서북쪽에 지리산 천왕봉(智異山 天王峯)이 바라보이는 곳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며 노년을 보냈다. 정면 세칸, 측면 두칸의 팔작지붕이며 마당에는 매화(남명매)가 심어져 있다. 이곳에서 조식에게 수학한 사람들 중 정인홍, 곽재우 등은 북학파를 형성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싸웠다.<두산백과에서 인용>
산천재(山天齋) 남명매(南冥梅)

 
지리산 천왕봉 아래 산청군 시천면 사리에 있는 산천재의 뜰에는 남명 조식(曺植, 1501~1572)선생이 61세이던 명종 16년(1561)에 손수 심은 매화나무가 있다. 산천재는 선생이 학문을 닦고 연구하던 곳으로 명종 16년(1561)에 세웠고, 순조 18년(1818)에 고쳐졌다. 규모는 앞면 2칸, 옆면 2칸이다.남명 선생은 영남의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룰 만큼 호남 학파의 수장이다. 평생 벼슬에 나가지 않았지만 죽어서 사간원(司諫院)과 대사간(大司諫)에 이어 영의정에 추서된 위인이다. 선생은 1501년(연산7년)에 경상도 삼가현에서 태어나 벼슬길에 나아간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주하였다가 그 후 의령, 김해, 삼가 등지에서 거주하였다. 선생은 61세가 되던 해에 산청의 덕산으로 이주해 그곳에 서실을 짓고 산천재라 이름하였다. 이 당호의 ‘산천(山天)’ 이란 말은《주역》대축괘(大畜卦)의 “강건하고 독실하게 수양해 안으로 덕을 쌓아 밖으로 빛을 드러내서 날마다 그 덕을 새롭게 한다"는 말에서 뜻을 취한 것으로 강건한 기상과 독실한 자세로 세상에 나아가지 않고 깊숙이 묻혀 심성을 도야하고 올바른 수양을 하는 것이 학자의 길임을 천명한 것이다. 선생은 산천재를 짓고는 그 뜰에 매화나무를 손수 심고 해마다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이 매화나무에 애정을 쏟았다.산천재의 뜰에 있는 이 남명매는 산천재를 건립할 당시에 심었다면 이제 440여년의 연륜을 헤아린다. 밑에서부터 크게 세 갈래로 갈라진 줄기는 뒤틀려서 위로 뻗어 올랐다. 윗부분의 가지는 일부 말라 죽었으나 새로운 가지가 섬세하게 자라나 비교적 건강한 편이다. 해마다 3월 말이면 연한 분홍빛이 도는 반겹 꽃이 가득히 피는데, 그 향기가 지극히 맑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평생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음으로써 진정한 은둔의 지사였던 남명의 그 맑은 정신이 남명매의 그윽한 향기속에 지금도 스며 있는 듯하다. 산천재의 정원의 끝 강쪽 언덕에는 남명매보다는 뒤에 심었을 것으로 보이는 크고 작은 매화나무가 서 있다. 또 산천재의 바깥뜰에는 수형이 아름답고 크게 자란 활엽상록수인 가시나무가 여러 그루 서 있어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대한민국구석구석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사적 제305호
문화재명칭 산청 조식 유적(山淸曺植遺蹟)
소재지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사리 산72번지
관리자(연락처) 문화재청, 경상남도 산청군

 

덕천서원(德川書院)
 
1576년(선조 9) 지방유림의 공의로 조식(曺植)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1609년(광해군 1) ‘德川(덕천)’이라고 사액되어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그 뒤 최영경(崔永慶)을 추가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0년(고종 7)에 훼철되었다가 1920년대 지방유림이 복원하였다.경내의 건물로는 숭덕사(崇德祠)·경의당(敬義堂)·동재(東齋)·서재(西齋)·신문(神門)·대문(大門)·세심정(洗心亭)·산천재(山天齋)·상실(橡室)·장판각(藏板閣)·별묘(別廟)·문루(門樓)·재실(齋室)·고사(庫舍) 등이 있고, 신도비(神道碑)도 있다.숭덕사는 3칸으로 된 사우(祠宇)로서, 조식의 위패와 최영경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경의당은 5칸으로 된 강당으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토론장소로 사용된다. 동서 양재는 유생들이 공부하며 거처하는 곳이고, 고사는 향례 때 제수(祭需)를 장만하며 보관하는 곳이다.이 서원에서는 매년 3월 초정(初丁 : 첫 번째 丁日)과 9월 초정에 향사를 지내며, 양력 8월 10일 남명제(南冥祭)를 행하고 있다. 제품은 4변(籩) 4두(豆)이다. 이 서원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유물로는 조식의 수묘사성현병풍(手描四聖賢屛風) 외 문집 약간이 있다. 재산으로는 전답 900평, 임야 10정보 등이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산청  산천재(山天齋) 안내문

 

▼ 산천재(山天齋) 입구에 커다란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선조대왕이 남명선생에게 내린 제문을 새겨 세웠다고 한다.

 

▼ 산천재(山天齋) 대문

 

▼ 산천재(山天齋) ... 아주 작은 건물이다. 이곳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면서 노년을 보냈을 남명선생을 생각해 본다.

 

▼ 산천재(山天齋) 앞마당에 있는 남명매...

 

▼ 남명매의 유래가 적혀 있다. 

 

▼ 산천재(山天齋)에 남명선생의 학문을 요약한 경(敬),의(義) 표식이 걸려있다. 

 

▼ 산천재(山天齋)에 있는 남명선생 문집 목판(경남유형문화재164호) 보관소... 

 

▼ 산천재(山天齋) 앞 뜰에서 바라본 지리산...

 

▼ 산천재(山天齋) 정문을 나오며...

 

▼ 산천재(山天齋) 건너 남명기념관은 코로나로 문을 닫아서 아쉽다.

 

▼ 산청 덕천서원(德川書院) 안내문

 

▼ 산청  덕천서원(德川書院) 안내문... 서원측에서 세운 것이다.

 

▼ 산청  덕천서원(德川書院) 홍살문과 삼문... 우측에 커다란 은행나무가 보호수로 지정 되어있다.

 

▼ 산청  덕천서원(德川書院) 삼문...

 

▼ 산청  덕천서원(德川書院) 전경.. 정면에 강당 경의당이 있다.

 

▼ 산청  덕천서원(德川書院) 강당 경의당(敬義堂)

 

▼ 산청  덕천서원(德川書院) 현판... 뒤에 경의당 현판이 보인다.

 

▼ 산청  덕천서원(德川書院) 동재 진덕재(進德齋)

 

▼ 산청  덕천서원(德川書院) 서재 수업재(修業齋)

 

▼ 산청  덕천서원(德川書院) 사당인 숭덕사(崇德祠)

 

▼ 산청  덕천서원(德川書院)에서 바라본 삼문... 한창 배롱나무가 꽃을 피웠다. 

 

▼ 산청  덕천서원(德川書院) 삼문 내부... 바깥쪽에 거목 은행나무가 서있다.

 

▼ 산청  덕천서원(德川書院) 바깥으로 나오면 강가에 세심정(洗心亭)이 있다.

 

▼ 세심정 옆에 남명선생 시비가 세워져 있다.  

 

▼ 산청 조식선생 유적지 위치 지도

 

▼ 산청  덕천서원(德川書院)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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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