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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역사문화유적 표석의 대부분은 서울 종로구와 중구에 거의 74% 정도가 존재하고 나머지 구청에 82개의 표석(26%)이 있다보니 오히려 종로, 중구는 답사하기 편해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데 나머지 구청 소재한 표석들은 찾기도 힘들고 자주 가보지도 못한다.
이번에 서울시 역사문화유적 표석을 다시 시작하면서 종로, 중구 소재한 표석은 뒤로 미루고 기타 구청에 있는 표석을 먼저 올리기로 결정한 것도 표석의 의미를 새기면서 서울시의 다른 지역에도 유적지, 역사적 장소가 많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이다.
먼저 표석현황을 올리고 앞에서부터 차례대로 올릴 예정이니 참고해서 표석을 찾는 분이나 표석에 관심 있는 분들은 활용하시기 바란다.
서울시 역사문화유적지 기념표석 구청별 설치현황(종로, 중구 제외)
<한 화면으로 올리다보니 사이즈가 너무 커져서 모바일로는 한화면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점 양해 바랍니다.>
서울시 역사문화유적지 표석 종로,중구 외 기타 구청별 설치현황('20.02.20 현재) | ||||||
총괄순서 | 구청별순서 | 구청별 | 설치연도 | 표석명 | 표석내용 | 표석위치 |
1 | 강동 1 | 강동구 | 1989 | 바위 절터 巖寺址 |
삼국시대에 세워졌다고 전하는 바위절 터 | 암사동 산1-7(도로명주소 없음) |
2 | 강서 1 | 강서구 | 1989 | 공암 나루터 孔巖津址 |
양천(陽川)과 행주(幸州)를 잇던 나루터, 일명 북포(北浦)나루라고 하였다. | 허준로5길 15(가양동 1468) |
3 | 강서 2 | 강서구 | 1990 | 염창 터 鹽倉址 |
조선시대 경기, 충청, 전라 등지에서 조세로 바쳐 올라온 소금을 저장하여 필요할 때 공급하던 소금 창고 터 | 양천로67길 77(염창동 66-9) |
4 | 강서 3 | 강서구 | 1994 | 이수정 터 二水亭址 |
조선중기 한산군 이덕연((韓山君 李德演)과 그 아우 충숙공 이덕형(忠肅公 李德泂) 형제가 세웠던 정자 터. | 양천로75길 57(염창동 288) |
5 | 강서 4 | 강서구 | 2003 | 행주나루 터 幸州津址 Site of Haengju Whart |
이곳에서 강변 쪽에 있던 행주나루는 강서구 개화동 갯모랭이 마을 앞에 있던 나루터의 이름이다. 행주대교가 놓이기 전에 개화동에서 예전의 고양군(高陽郡) 지도읍(知道邑) 행주리(幸州里)로 건너가는 나루터였다. 갯모랭이는 갯가 모퉁이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한강 하류는 인천만의 바닷물이 들어와 섞여지므로 소금기가 있어서 강변이지만 갯가라고 하였다. | 개화동 205-42(도로명주소 없음) |
6 | 광진 1 | 광진구 | 1988 | 광나루 터 廣津址 |
서울과 강원지방을 이어주던 나루터, 원래 너븐나루 | 아차산로78길 90(광장동 112) |
7 | 광진 2 | 광진구 | 2009 | 낙천정 터 | 태종(太宗)이 왕위를 세종(世宗)에게 물려주고 지은 ‘이궁(離宮) 낙천정(樂天亭)’이 있던 곳이다. 이곳에서 세종은 태종과 의논하여 대마도(對馬島) 정벌군을 파병하였고, 이기고 돌아온 정벌군의 환영식을 베풀었다. |
뚝섬로 58길 101(자양동 671) |
8 | 광진 3 | 광진구 | 1989 | 뚝섬 나루터 | 이곳은 강남 송파와 청숫골을 잇던 나루터 | 자양동 126-1(도로명주소 없음) |
9 | 광진 4 | 광진구 | 1987 | 화양정 터 華陽亭址 |
화양정은 사복시(司僕寺) 말 목장(牧場) 안에 있던 정자로, 1432(세종 14)년에 세워져 군사훈련, 사냥, 계회(契會) 등에 이용되었다. 1911년 낙뢰(落雷)로 소실되었다. | 화양동 110-32(도로명주소 없음) |
10 | 금천 1 | 금천구 | 1996 | 강희맹 살던 곳 姜希孟 |
조선 초 문인화가로 좌찬성을 지낸 강희맹(1424~1483)이 살면서 농업 전반에 관한 금양잡록(衿陽雜錄)을 저술하던 곳 | 독산로32나길 36(시흥동 807-14) |
11 | 금천 2 | 금천구 | 1996 | 시흥향교 터 始興鄕校址 |
조선시대에 공자(孔子)등 성현을 봉안하고 유생들을 교육하던 곳으로 1944년 일제가 과천향교(果川鄕校)에 통합시켰음 | 금하로 745(시흥동262-6) |
12 | 금천 3 | 금천구 | 2000 | 흥선대원군 별장 터 興宣大院君別莊址 |
고종의 생부 흥선대원군이 지은 별장 터. 현재는 철거되었으나 1985년까지 서울 대가(大家)의 전형적인 정원과 담장이 특유의 아름다움을 간직했었다. | 탑골로3길 50(시흥동 220-2) |
13 | 도봉 1 | 도봉구 | 1997 | 다락원 터 樓院店址 |
조선시대 사상도고(私商都賈)들이 북방어물을 매점하는 등 상업활동을 하던 곳 | 도봉동 279-14(도로명주소 없음) |
14 | 동대문 1 | 동대문 | 1987 | 보제원(普濟院) 터 | 1393년~1895년 여행자의 무료 숙박과 병자에 약을 주던 곳 | 약령시로 2(제기동 148-115) |
15 | 동대문 2 | 동대문 | 2004 | 성동역 터 城東驛址 Site of Seongdong Sation |
성동역은 일제강점기 1939년 7월 25일 경춘철도회사가 부설한 사설철도(私設鐵道)인 경춘선의 출발역이었다. 이 역에는 30여 년간 경기도북부와 강원도 일대의 임산물, 농산물이 많이 운반되었다. 광복 후 경춘선 사설철도는 국유화 되었으며 1970년 청량리역으로 이전하자 헐렸다. | 왕산로 109(제기동 892-71) |
16 | 동대문 3 | 동대문 | 2009 | 전영택 집터 | 목사이고 소설가이며 한국 신문학 운동의 개척자인 늘봄 전영택(1894~1968)이 살던 곳이다. 그는 1919년 최초 문예잡지 <창조>의 동인이며 작품으로는 소설 <화수분(1925년)>,<소(1964년)>, 찬송가 <사철에 봄바람> 등이 있다 | 이문로21길 7(이문동 327-15) |
17 | 동대문 4 | 동대문 | 2001 | 휘경원 터 徽慶園址 Site of Hwigyeongwon Tomb |
휘경원은 조선 23대 임금 순조의 생모인 수빈(綏嬪) 박씨(1770~1822)의 무덤이다. 1823년(순조 23) 조성되었다가 1863년(철종 14)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으로 옮겼다. | 망우로18나길 20(휘경동 286-66) |
18 | 동작 1 | 동작구 | 2000 | 노강서원 터 鷺江書院址 Site of Nogangseowon Confucian Academy |
노강서원은 1689년(숙종 15) 인현왕후 폐위에 반대하다가 혹독한 국문(鞠問)을 받고 진도로 유배 도중 사망한 박태보(朴泰輔, 1654~1689)를 배향한 서원으로 1695년(숙종 21) 그가 사망한 장소 인근에 건립되었다. 한국전쟁 중 파괴되었으며 1969년 경기도 의정부시에 중건되었다. | 노량진로23가길 23(본동 494) |
19 | 동작 2 | 동작구 | 1989 | 노량진 터 鷺梁津址 Site of Noryangjin Ferry |
노량진은 용산과 마주한 한강 남쪽 기슭의 나루이다. 서울과 충청도·경상도·전라도를 잇는 수상 교통의 요지였으며,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 철교가 놓인 곳이기도 하다. | 노량진로 247(본동 258-1) |
20 | 동작 3 | 동작구 | 1993 | 사충서원 터 四忠書院址 Site of Sachungseowon Confucian Academy |
사충서원은 경종을 폐하고 연잉군(후의 영조)을 왕위에 올리려 했다는 의심을 받아 1722년(경종 2) 사형된 노론 4대신 김창집, 이이명, 조태채, 이건명을 배향한 서원으로 1725년(영조 1) 건립되었다. 1927년 보광동으로 옮겨졌으나 한국전쟁 중 파괴되었으며, 1968년 경기도 하남시에 중건되었다. | 노량진로 135(노량진동 60-19) |
21 | 동작 4 | 동작구 | 2001 | 심훈 생가 터 沈薰生家址 Shim Hun's Birthplace |
심훈(1901~1936)은 소설 <상록수>로 유명한 일제시대에 활동했던 소설가이자 시인이며 영화인이었다. 그는 3·1운동에 참여하여 투옥과 함께 퇴학당한 뒤 중국으로 망명하여 수학하다가 1923년에 귀국했다. 최초의 영화소설 <탈춤>, 영화<먼동이 틀 때>, 시 <그날이 오면>, 소설 <상록수> 등의 작품을 남겼다. Shim Hun's Birthplace Famous for his novel Evergreen Trees, Shim Hun(1901-1936) was not only a novelist and poet but also an actor, screen writer, and director |
흑석로13길 3(흑석동 186) |
22 | 동작 5 | 동작구 | 1987 | 장승백이 | 장승배기는 정조가 부친 사도세자의 헌륭원에 참배하러 가면서 쉬었던 곳이다. 당시 이곳은 인가도 없고 행인마저 적었는데 정조가 장승을 만들어 세우라고 지시한 이후 장승배기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 장승배기로 94(노량진동 310-150) |
23 | 동작 6 | 동작구 | 2002 | 주교사 터 舟橋司址 Site of Jugyosa Office |
주교사는 임금이 행차할 때 한강에 부교(浮橋)를 놓는 일과 전라도와 충청도 지방의 조운(漕運)을 맡아보던 조선시대의 관아이다. 정조 13년(1789)에 설치되었으며, 고종 19년(1882)에 폐지된 후 업무가 금위영(禁衛營)에 이관되었다. | 노량진로32길 10(본동10-23) |
24 | 마포 1 | 마포구 | 1993 | 3.1독립운동기념터;마포전차 종점 (獨立運動記念地) |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마친 시위군중이 오후 8시경 이곳에 운집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던 곳 | 마포대로 20(마포동 140) |
25 | 마포 2 | 마포구 | 2001 | 공세청 터 貢稅廳址 Site of Gongsecheong Government Office |
공세청은 조선시대에 서강나루로 들어오는 선박에서 세금을 거두던 관청이다. 서해로 통하는 길목으로 지방에서 올라오는 조세 수송선의 집결지였던 서강나루에는 공세청과 함께 점검청(點檢廳), 광흥창(廣興倉)도 있었다. | 창전로 10(신정동 145-7) |
26 | 마포 3 | 마포구 | 1989 | 광흥창 터 廣興倉址 |
조선시대 관원의 녹봉(祿俸)으로 쓰일 양곡(糧穀)을 저장하던창고 터 | 창전동 446-5(도로명주소 없음) |
27 | 마포 4 | 마포구 | 2003 | 담담정 터 淡淡亭址 Former Site of Damdamjeong(Pavilion) |
담담정은 조선 초에 안평대군이 지은 정자였으나 세조 때 신숙주(申叔舟:1417 ~1475)의 별장이 되었다. 안평대군은 이 정자에 만여 권의 책을 쌓아 두고, 시회(詩會)를 베풀었다. 신숙주는 세종 때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고, 야인 정벌에 공을 세웠으며 네 번이나 영의정을 지냈다. 세조는 이 정자에 거둥하여 중국의 배를 구경하고, 각종의 화포를 쏘는 것을 구경하였다. 그 후 이 정자 터에는 마포장(麻浦莊)이 지어져 광복 후 이승만 대통령이 잠시 머물기도 하였다. | 마포대로 4길 122(마포동 419-13) |
28 | 마포 5 | 마포구 | 2001 | 무쇠막 터 Site of Musoemak Village |
무쇠막은 정부에 무쇠솥이나 농기구를 만들어 바친 철공장이 모여 있던 곳이다. 일찍부터 무쇠막 또는 무수막 터로 알려졌는데, 무수막에서 수철(水鐵)이라는 이름이 생겼고 수철리에서 신수동이라는 동 이름이 유래하였다. | 독막로 189(신수동 112-1) |
29 | 마포 6 | 마포구 | 2003 | 박세채정승 살던 곳 朴世采政丞家址 Former Site of Bak Se-chae's House |
박세채(1631~1695)는 조선후기 숙종 때 우의정, 좌의정을 지낸 관리이며, 유학자로 소론(少論)의 대표가 되었다. 그는 사회규범으로써 예학(禮學)을 일으키는 일에 전념하여 '예학의 대가'라고 칭하며, 대동법의 실시를 적극 주장하였다. 그의 아호인 현석(玄石)을 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 신수로3길 23(현석동 220) |
30 | 마포 7 | 마포구 | 1989 | 삼개포구 麻浦浦口 |
황해를 거쳐 서울로 들어오던 물화(物貨) 집산(集散)의 포구 | 토정동 136-1(도로명주소 없음) |
31 | 마포 8 | 마포구 | 1994 | 서강 나루터 西江津址 |
삼개 나루(용호,마호,서호)의 하나. 삼남 지방과 서해안으로부터 곡물과 어물이 들어오던 나루터. | 창전로 10(신정동 145-7) |
32 | 마포 9 | 마포구 | 1987 | 서활인서(西活人署) 터 | 전염병자를 격리 치료하던 의료기관이 있었던 곳 | 마포대로 247(아현동 267-1) |
33 | 마포 10 | 마포구 | 1989 | 양화진 나루터 楊花鎭津址 |
서울과 제물포, 강화 방면을 잇던 나루터 | 합정동 353-4(도로명주소 없음) |
34 | 마포 11 | 마포구 | 1992 | 토정 터 土亭址 |
조선중기 저명한 역학자(易學者)였던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의 집터. | 토정길32길 11(토정동 138) |
35 | 서대문 1 | 서대문 | 1997 | 경기중군영 터 京畿中軍營址 |
조선후기 경기도 순영(巡營)의 지휘관인 중군(中軍)이 있었던 터 | 통일로 165(천연동 13-1) |
36 | 서대문 2 | 서대문 | 1987 | 독립관 터 獨立館址 Site of Korea Independence Club House |
독립관은 독립협회(獨立協會, 1896~1898)의 회관으로 조선시대에는 중국 사신을 접대하던 모화관이었다. 독립의식과 민권사상을 고취하려는 토론회가 이곳에서 자주 열렸으며, 독립협회 해산 후 여러 용도로 사용되다가 일제강점기에 철거되었다. Korean Independence Club House(Dongnipgwan) was a meeting hall for Independence Club. Renamed from Mohwagwan, the meeting hall that was originally built to serve Chinese ambassadors, this place often held Independence ceremonies and discussions for the instillation of civil liberties. |
영천동 268-5(도로명주소 없음) |
37 | 서대문 3 | 서대문 | 2001 | 복주우물 福主井 Bokju Well |
복주우물은 복주 즉, 귀인(貴人)이 이용하는 우물이라는 뜻이다. 이 우물 뒤쪽의 금화산은 공기와 물이 맑아 장수하는 노인이 많았다. 그래서 복수산(福壽山)이라고도 하였는데 후에 음이 와전되어 복주산으로 불렸다. 이에 따라 산 아랫마을을 복주산동, 그 마을의 우물을 복주우물이라 부르게 되었다. Bokju Well Bokju Well means a well that is used by Bokju, or noble men. |
북아현로140(북아현동 1-1616) |
38 | 서대문 4 | 서대문 | 2002 | 연희궁 터· 서잠실 터 衍禧宮址·西蠶室址 Site of Yeonhuigung Palace Site of Seojamsil |
연희궁은 조선 초기에 지은 이궁(離宮)의 하나이다. 1420년 세종이 부왕인 태종을 위해 고쳐지었으며, 세종 자신도 1426년에 이 곳에 잠시 머물렀다. 또한 세종은 이 궁에 국립양잠소격인 잠실도회(蠶室都會)를 설치하였으며, 그 뒤 세조는 서잠실(西蠶室)이라고 하였다. 1505년에는 연산군이 이를 개축하여 연회장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 연세로 50(신촌동 134) |
39 | 서대문 5 | 서대문 | 2001 | 의령원 터 懿寧園址 Site of Uiryeongwon Tomb |
의령원은 영조의 세손 의소(懿昭)의 묘원(墓園)이다. 의소는 영조 26년(1750) 사도세자의 장자로 태어나 세손으로 책봉되고 다음 해 죽어 이곳에 장사되었다. 세손이었기에 장례 절차며 치장에 격식을 갖추어 속칭 '애기능'이라 불렀으며 1948년 서삼릉으로 옮겨갔다. Site of Uiryeongwon Tomb Uiryeongwon is the tomb of Uiso, a grandson of Yeongjo, the 21th king of the Joseon Dynasty, who died the year after he became crown prince. |
북아현로11가길 7(북아현동 190-1) |
40 | 서대문 6 | 서대문 | 1996 | 천연정 터 天然亭址 |
천연정은 도성 밖 서지(西池) 서쪽 가에 있던 정자로, 18세기 중엽에 세워져 경기감영 중영(中營)의 부속 건물로 사용되었다. | 통일로 165(천연동 13-1) |
41 | 서대문 7 | 서대문 | 2001 | 청수관 터 淸水館址 Site of Cheongsugwan Building |
청수관은 조선시대에 경기중군영(京畿中軍營) 안에 있던 건물이다. 1880년(고종 17) 하나부사(花房義質)가 이 건물에 입주하면서 일본공사관으로 사용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 공관인 이 건물은 1882년(고종 19) 불타 없어졌다. | 통일로 165(천연동 13-1) |
42 | 서대문 8 | 서대문 | 2001 | 초리우물 터 楚里井址 Site of Chori Well |
초리우물은 물맛이 달고 차가우며, 물이 꼬리처럼 끊이지 않고 흘러 넘쳐서 아무리 추운 한겨울에도 물이 얼지 않는다고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달고 차가운 물이 염색하기에 좋아서 염색을 하는 사람들이 이 근처에 많이 살았다고 한다. 이 부근 마을을 미정동(尾井洞)이라고 했던 것도 이 우물 때문이다. Site of Chori Well The name of Chori well was derived from an archaic form of the word "kkori," or tail, since sweet and cool water flows continuously in the shape of a long tail, even in the cold winter. |
통일로 97(미근동 209) |
43 | 서대문 9 | 서대문 | 1997 | 홍제교 터 弘濟橋址 |
조선시대 도성에서 의주로 통하는 길목인 홍제천에 놓였던 돌다리터. 일명 서석게다리 | 통일로 483(홍은동 217-27) |
44 | 서대문10 | 서대문 | 1987 | 홍제원(弘濟院) 터 | 여기서 약 50m 골목 안 홍제동 138번지 일원은 홍제원(1394~1895) 터 | 통일로 416(홍제동 137-25) |
45 | 서초 1 | 서초구 | 1988 | 동재기 나루터 銅雀津址 |
수원 이남 삼남(충청,영남,호남) 지방과 서울(漢陽)을 이어주던 나루터 | 신반포로11길 40(반포동 115-5) |
46 | 서초 2 | 서초구 | 1993 | 양재역 터 良才驛址 |
조선시대 서울을 왕래하는 공무여행자에게 말(馬)과 숙식을 제공하던 역 터 | 강남대로 221(양재동23) |
47 | 성동 1 | 성동구 | 1989 | 독서당 터 讀書堂址 |
조선시대 뛰어난 선비들에게 특별 말미를 주어 글을 읽게 한 독서당 터, 일명 "동호당(東湖堂)"이라 하였다. | 독서당로 191(옥수동 428) |
48 | 성동 2 | 성동구 | 1998 | 동빙고 터 東氷庫址 |
조선시대 종묘(宗廟), 사직(社稷)의 제사때 쓰던 얼음을 보관하던 창고터로 연산군 10년(1504) 동빙고동으로 옮겨졌음 | 독서당로 40길 25(옥수동 4) |
49 | 성동 3 | 성동구 | 1997 | 두뭇개 나루터 豆毛浦址 |
경상·강원도의 세곡 등 물산이 집결되었고 경승지로도 유명하였던 나루 터 | 한림말길 50(옥수동 100) |
50 | 성동 4 | 성동구 | 1998 | 마조단 터 馬祖壇址 |
조선시대 국립 살곶이목장(箭串牧場)안에 있던 말의 무병(無病)과 번식을 위해 말의 조상에게 제사지내던 제단터(祭壇址) | 왕십리로 222(행당동 17) |
51 | 성동 5 | 성동구 | 2000 | 무쇠막 터 | 조선시대 선철(銑鐵)을 녹여 농기구, 무쇠솥 등을 주조(鑄造)하던 대장간 집단지로 무쇠를 녹이던 곳. 무시막이라고도 하였다. | 독서당로 335(금호동1가 1558) |
52 | 성동 6 | 성동구 | 2000 | 사한단 터 司寒壇址 |
조선시대 빙고(氷庫)에 얼음을 저장할 때와 꺼낼 때 수우신(水雨神)인 현명씨(玄冥氏)에게 제사를 지냈던 터. 얼음이 잘 얼게 해달라고 동빙제(凍氷祭)와 기한제(祈寒祭)를 지냈는데 1908년에 폐지되었다. | 독서당로 40길 25(옥수동 4) |
53 | 성동 7 | 성동구 | 2001 | 쌍호정 터 雙虎亭址 Ssanghojeong Pavilion Site |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1808-1890)의 생가에 있던 정자 터. 신정왕후는 효명세자(孝明世子)의 빈(嬪)이자 헌종의 어머니로 고종 즉위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가 태어나던 날 밤에 정자 앞에 호랑이 두 마리가 나타났다 하여 쌍호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Ssanghojeong Pavilion Site The site is a garden pavilion called Ssanghojeong('Twin Tiger' Pavilion), which once stood as part of the house where Queen Sinjeong(1808-1890) was born. she married Crown Prince Hyomyeong, gave birth to King Heonjong, and played a ket role in the enthronement of King Gojong. The name of the pavilion came from when two tigers visited the site when the queen was born. |
독서당로 218(옥수동 250) |
54 | 성동 8 | 성동구 | 2001 | 입석포 터 立石浦址 Site of Ipseokpo Estuary |
입석포는 천연의 낚시터로 이름이 높았던 곳이다. '입석포'는 한천변의 큰 바위들이 사람처럼 서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조선시대에는 선돌개라 불리기도 하였다. 넓은 평야와 강 가운데 저자도를 포함하는 주변의 수려한 경관은 조선조 문인 서거정, 강희맹 등의 예찬 시로도 유명하다. Site of Ipseokpo Estuary Ipseokpo was a fishing spot well known as nature's gift, and it was given the name Ipseokpo because large stones standing by the banks resembled men. |
응봉동 271(도로명주소 없음) |
55 | 성동 9 | 성동구 | 1988 | 전관원 터 箭串院址 |
조선시대 일반 길손이 머물 수 있던 서울근교 네 숙소(四院)의 한 곳 | 왕십리로 189(행당동 66-3) |
56 | 성북 1 | 성북구 | 1987 | 동활인서 터 東活人署址 Site of the Eastern Office for Medical Treatment |
활인서는 조선 초기 전염병 환자와 가난한 환자를 치료하려고 서울의 동쪽과 서쪽 두 곳에 설치한 관청이다. 동활인서는 동소문 밖에 있었고, 서활인서는 서소문 밖에 있었는데 1882년(고종 19) 폐지되었다. | 동소문로 63(동소문동4가 260) |
57 | 성북 2 | 성북구 | 2002 | 인명원 터 仁明園址 Site of Inmyeongwon Tomb |
인명원은 조선후기 정조의 후궁인 원빈(元嬪) 홍씨(洪氏)의 묘소이다. 1950년 6월 13일 서삼릉(西三陵) 내의 귀인·숙의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 안암로 145(안암동 5가 1-2) |
58 | 송파 1 | 송파구 | 2003 | 둔촌 이집 선생 집터 遁村李集先生家址 Former Site of Yi Jip's House |
이집 선생(1327~1387)은 고려 말기의 학자·문인으로 본관은 광주(廣州), 호는 둔촌(遁村)이었다. 충목왕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문장을 잘 짓고 지조가 굳기로 명성이 높았다. 공민왕 17년(1368) 신돈(辛旽)의 미움을 받아 이곳 토굴로 피난하여 숨어살았다. 현재의 송파구 방이동으로 바뀌기 전에 둔촌동이었던 이 인근에 둔굴·밖둔굴·안둔굴·굴바위 등의 지명이 남아있다. | 강동대로 300(방이동 89-4) |
59 | 송파 2 | 송파구 | 1990 | 삼전 나루터 三田渡址 |
경기도 광주, 여주 일대와 서울을 이어주던 유명한 나루터 | 잠실동 48(도로명주소 없음) |
60 | 송파 3 | 송파구 | 1988 | 송파 나루터 松坡津址 |
삼남(충청,영남,호남) 지방과 서울(漢陽)을 이어주던 조선후기의 나루터 | 석촌호수로 258(송파동 7-1) 건너편 |
61 | 영등포 1 | 영등포 | 2001 | 방학호진 터 放鶴湖津址 Site of Banghakhojin Ferry |
방학호진은 신길동에서 샛강을 지나 마포나루로 건너갈 때 이용하던 나루이다. 나무가 무성한 흰 모래사장과 언덕의 경치가 빼어나고, 학이 노는 호수 같다고 하여 이 이름이 붙여졌다. | 영등포로62길 1(신길동 171-9) |
62 | 용산 1 | 용산구 | 1986 | 군자감(軍資監) 강감(江監) 터 |
태조 4년(1395)~광무 2년(1898) 전국 군전(軍田)에서 군량을 받아드려 저장하던 관아 자리 | 원효로길41길 33(원효로3가1-2) |
63 | 용산 2 | 용산구 | 1989 | 독서당 터 讀書堂址 |
조선시대 뛰어난 선비들에게특별 말미를 주어 글을 읽게한 독서당터. 일명 남호당(南湖堂)이라 하였다. | 삼개로 65(청암동 181) |
64 | 용산 3 | 용산구 | 2000 | 만리창 터 萬里倉址 Site of Mallichang Storehouse |
만리창은 공물 대신 거둬들인 쌀, 베, 돈의 출납을 맡았던 선혜청(宣惠廳)의 별창(別倉)이다. 선혜청은 1608년(선조 41) 설치되었으며, 1753년(영조 29) 균역청(均役廳)을 병합하였다가 1894년(고종 31) 폐지되었다. | 백범로 260(효창동 274) |
65 | 용산 4 | 용산구 | 2019 | 별영창.읍청루 터 別營倉 挹淸樓 址 Site of Byeolyeongchang and Eupcheongru |
별영창은 훈련도감 군병의 급료를 지급하였던 곳이다. 읍청루는 별영창에 딸린 누각으로 한강 조망이 뛰어났다. 1934년 마포로 가는 도로를 만들면서 지형이 바뀌고 건물도 사라졌다. | 한글 영문 |
66 | 용산 5 | 용산구 | 2015 | 삼호정 터 三好亭 |
삼호정은 순조~철종대 인물인 김덕희(金德喜)의 별장으로 조선 말기 여성들이 시사(詩社) 활동을 한 무대였다. 김덕희의 첩인 김금원(金錦園)을 비롯한 여성 다섯 명이 이곳에 자주 모여 시회(詩會)를 열었다. | 산천동 200(도로명주소 없음) |
67 | 용산 6 | 용산구 | 1992 | 새남터 沙南址 |
조선시대 사형수들을 처형하던 터.(용산구 이촌동 199번지1호 부근) | 이촌로 71(이촌동 1-43) |
68 | 용산 7 | 용산구 | 1990 | 서빙고 터 西氷庫址 |
조선시대 8채의 움막집 형태로 지어졌던 얼음창고 터, 이 얼음은 궁중과 백관들이 사용하였다. | 서빙로로 245(서빙고동 199-3) |
69 | 용산 8 | 용산구 | 1998 | 수표 터 水標址 |
조선조 세종 때 한강의 수위(水位)를 재기 위해 제천정 (濟川亭) 아래에 세웠던 수표 터 |
서빙고로 413(한남동 805) |
70 | 용산 9 | 용산구 | 2003 | 영성단 터 靈星壇址 Former Site of Yeongseongdan(Altar) |
영성단은 조선시대 새해 농사가 잘 되도록 곡식을 맡은 별과 농사를 맡은 별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만든 제단이다. 조선은 한양 천도 후에 이곳 남교(南郊)에 제단을 설치하고 입추 후 진일(辰日)을 택하여 제사를 지냈다. 또한 태조가 발신한 함흥에도 영성단을 설치하고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 | 유엔빌리지길 62(한남동 390) |
71 | 용산 10 | 용산구 | 1987 | 와서(瓦署) 터 | 태종 5년(1405)~고종 19년(1882) 기와를 굽던 관아 자리 | 서빙고로 35(한강로3가 63-389) |
72 | 용산 11 | 용산구 | 1994 | 이봉창(李奉昌) 의사 집터 |
독립운동가 이봉창(1901~1932)이 살던 집터이다. 이봉창은 1932년 1월 8일 도쿄 요요키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일왕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졌으나 명중시키지 못하였고, 그해 10월 비공개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순국하였다. | 한글 영문 |
73 | 용산 12 | 용산구 | 1988 | 이태원 터 梨泰院址 |
조선시대 일반 길손이 머물 수 있던 서울근교 네 숙소(四院)의 한 곳 | 두텁바위로 60(용산동2가 1) |
74 | 용산 13 | 용산구 | 2002 | 전생서 터 典牲署址 Site of Jeonsaengseo Office |
전생서는 궁중의 각종 제사 때 쓸 가축을 기르는 일을 맡았던 조선시대의 관아이다. 1460년 세조 때 고려시대의 장생서(掌牲署)를 계승한 관아인 전구서(典廐署)의 이름을 전생서로 바꾸고 이 곳에 설치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 후암로4길 70(후암동 370) |
75 | 용산 14 | 용산구 | 1993 | 제천정 터 濟川亭址 |
조선시대 정자 터로 한강가 절경지의 하나 | 서빙고로 413(한남동 805) |
76 | 용산 15 | 용산구 | 1999 | 창회정 터 蒼檜亭址 |
이 언덕 위에 있었던 조선시대의 정자로서 군사훈련을 사열(査閱)하는 곳으로도 사용되었음 | 서빙고로 245(서빙고동 199-3) |
77 | 용산 16 | 용산구 | 1996 | 천일정 터 天一亭址 |
조선 성종 때 좌의정을 지낸 김국광(金國光)이 세운 정자로 이항복(李恒福)등이 별장으로 사용하던 곳 | 한남대로 12(한남동 454-4) |
78 | 용산 17 | 용산구 | 1997 | 청파배다리 터 靑坡舟橋址 |
조선시대 도성에서 청파·원효로로 통하는 주요 길목인 만초천(萬草川)에 놓였던 돌다리 터 | 청파로 319(청파동1가 164-1) |
79 | 용산 18 | 용산구 | 1989 | 한강진 나루터 漢江鎭津址 |
이곳 한강가는 건너편 사평(沙平)나루를 잇던 나루터 | 독서당로 23(한남동 110-1) |
80 | 은평 1 | 은평구 | 2006 | 산골고개 碌磻峴 Sangol-gogae(Pass) |
예로부터 이곳에서 산골(生骨 또는 碌磻)이 출토되어 산골고개 또는 녹번고개(碌磻峴)라고 불렀다. 산골은 푸른 빛의 광물질로 골절되었을 때 먹으면 잘 붙는다고 전해진다. | 응암동 산 1-120(도로명주소 없음) |
81 | 은평 2 | 은평구 | 2008 | 여기소 터 汝其沼址 |
조선 숙종 때 북한산성 축성에 동원된 관리를 만나러 먼 시골에서 온 기생이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이 못에 몸을 던졌다는 전설에서 너(汝)의 그 사랑(其)이 잠긴 못(沼), 전설에서, 곧 여기소라 하였다고 전해온다. |
의상봉길 8(진관동 302-3) |
82 | 은평 3 | 은평구 | 1993 | 연서역 터 延曙驛址 |
조선시대 서울을 왕래하는 공무여행자에게 말(馬)과 숙식을 제공하던 역 터 | 서오릉로 118-1(대조동 49-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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