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능안부원군 구사맹 묘

 

구사맹은 추존 원종의 국구로 더 알려져 있는데 자료에는 원종이 추존된 왕이다보니 잘 몰라서 그냥 능안부원군으로 더 많이 쓰이고 있다. 안타깝게도 묘역이 많이 변해 있었다. 인터넷 자료에서는 괜찮아 보여서 별 뜻 없이 현장을 갔는데 가서 보니 신도비의 위치가 이상해서 자세히 살펴본 바 경춘선철로 개설로 인해 묘역이 동쪽으로 약 30여미터 이동해 있었다. 

 

구사맹, 구굉 부자의 묘와 신도비를 옮긴 것이다. 신도비의 순서도 옮기면서 좌로부터 구사맹, 구굉, 구인기 순으로 바뀌었다. 구사맹의 묘비에는 이름이 없어서 처음 찾는 사람은 누구인지 몰라 헷갈리게 되어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구굉 묘비에 이름이 있어 유추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문중에서 작은 안내판이라도 하나 세워주면 선현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능안부원군 구사맹(具思孟) 
 
1531년(중종 26)∼1604년(선조 3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경시(景時), 호는 팔곡(八谷). 아버지는 의신군(義信君) 이징원(李澄源)의 사위로 영의정에 추증된 구순(具淳)이며,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아버지이다. 유희춘(柳希春)·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49년(명종 4) 진사가 되고, 155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가 된 뒤,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을 역임하였다.
1560년 전적이 된 뒤 사간·정언을 거쳐 1563년 사은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교리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이조좌랑·이조정랑을 지내고, 사인을 거쳐 사재감정으로 재직중, 1567년 명종이 죽자 빈전도감제조(殯殿都監提調)가 되었다.
1569년(선조 2) 황해도관찰사가 되고, 이어서 동부승지에 재직중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576년 다시 기용되어 첨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전라도관찰사·형조참의 등을 거쳐 좌부승지로 있다가 다시 대간의 탄핵을 받고 남양부사로 나갔다.
1590년 좌부승지가 되고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호종하여 의주로 피난하고, 평양으로부터 왕자를 호종한 공으로 이조참판에 올랐다.
1594년 지중추부사, 이듬해 공조판서가 되었으며, 이몽학(李夢鶴)의 역옥(逆獄)에 참국(參鞫)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왕자와 후궁을 시종하여 성천에 피난하였으며, 이어서 좌참찬·이조판서 등을 거쳐 좌찬성이 되었다.
그러나 1602년 맏아들인 구굉(具宏)이 유배되자 곧 사직하였다. 선조 때 신진사류들의 원로사류에 대한 탄핵이 심하여 대부분의 사류들이 뜻을 굽혔으나 끝내 신진을 따르지 않아 자주 탄핵을 받았다. 왕실과 인척이면서도 청렴결백하고 더욱 근신하여 자제나 노복들이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였다.
죽은 뒤 호성(扈聖)·선무(宣武)·정난(靖難) 등의 원종공신에 책록되고, 1632년 정원군(定遠君)이 원종(元宗)으로, 그의 다섯째딸이 인헌왕후로 추숭됨에 능안부원군(綾安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다.<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미지정
문화재명칭 능안부원군 구사맹 묘
소재지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산93-1(금곡동745-1철길 밑에 주차하고 걸어서 들어감)
관리자(연락처) 능성구씨

 


 

▼ 경춘선 철로 신설로 옆에서 현위치로 묘역을 이장했다...

 

 

 

▼ 위성사진으로 본 남양주 능성구씨 묘역도

 

 

 

▼ 경춘선 철로 옆에 세워진 신도비 뒷모습..

 

 

 

▼ 신도비의 정면 모습.. 왼쪽부터 구사맹, 구굉, 구인기 신도비

 

 

 

▼ 구사맹 신도비.. 비좌가 없이 몸체만 있다. 

 

 

 

 

▼ 구사맹 묘역 전경

 

 

 

▼ 구사맹 묘 측면

 

 

 

▼ 구사맹 묘

 

 

 

▼ 구사맹 묘비..  능안부원군이라는 표식으로 구사맹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구사맹 묘 석물

 

 

 

 

▼ 구사맹 묘 후경

 

 

 

 

 

 

728x90
반응형
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