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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윤씨(南原尹氏) 영사정(永思亭) 묘역

 

김포지역 묘지 답사는 십 여 년 전에 혼자서 진행한 기억이 나는데 최근에 묘역을 다시 찾아보니 못가본 묘역이 너무 많아서 날을 잡아 다시 다녀왔다. 요즘엔 언덕을 오르내리는 것도 힘이 들어 자꾸 꽤만 늘어 같이 간 후배에게 사진을 부탁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진정한 답사는 그래서는 안되는데 문중 묘를 답사하다 보면 광범위한 지역에 묘가 산재되어 있어서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사진만 올리는 경우가 있으니 이해 바란다.
남원윤씨는 예전에 행주기씨 문중 묘를 답사할 때 윤지득 묘를 답사하면서 알았고, 서울둘레길 답사 때 삼성산 아래에 있는 오자등과 윤길 묘를 우연히 마주하고 김포에 있는 남원윤씨 종중 묘를 꼭 보겠다고 마음 먹었는데 찾는데 무려 10여 년이 흐른 것 같다. 
김포 신곡리는 윤은선생의 묘가 들어온 후 후손들이 묘지관리를 위해 세거지로 변했다고 본다. 윤은의 아버지 윤지득(尹之得)은 고려 공조전서(工曹典書) 기 면(奇 勉)의 딸 행주기씨와 결혼하였으나 일찍 졸(卒)하였다. 
행주 기씨(奇氏)가 자신의 친정 선산에 남편의 묘를 이장함으로써 처가의 선영에 묘가 있게 된 배경이다. 이때 묘자리를 얻으려고 기씨 부인이 묘역에 물을 부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데 이런 류의 전설은 모든 처가 선산에 들어간 묘들의 공통된 전설이다. 현재까지 경기도 고양시 성사동에 있는 행주기씨 선산에 윤지득선생 묘가 들어있다. 상당히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남원윤씨들은 윤지득의 묘자리가 명당(明堂)이라 많은 자손들이 영달했다고 믿고 있다.
이곳 영사정 묘역에는 윤은선생 후손들이 터를 잡고 이후에 많은 충신들을 배출했는데 묘역이 앞쪽이 훤하게 트여 있고 한강을 바라보고 있다. 물길이 들어오는 방향이지만 대강수가 치고 오는 것은 좋게 보지 않는다.
앞쪽 전호산이 안산역할을 하고 청룡쪽에도 백마산이 막아주고 현재 이곳에 댐과 수중보가 건설되어 물을 모으고 있어서 후손들이 재물에서는 넉넉한 기운을 얻을 것으로 보이는데 벌써 묘역 조성되고 500여 년이 흘렀으니 그 기운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1.남원윤씨(南原尹氏)
전라북도 남원시에서 윤위(尹威)를 시조로 하고, 남원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남원윤씨는 윤위(尹威)가 고려 신종(神宗) 때 남원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한 것이 계기가 되어 남원을 본관으로 하게 되었는데 윤위는 파평윤씨(坡平尹氏) 시조(始祖)인 윤신달(尹莘達)의 8세손이다.윤위(尹威)는 고려 명종 때에 문과에 급제한 후 호남안렴사로 재직 중 복기남(卜奇男)의 반란을 평정하여 남원백에 책봉되었다. 그 뒤 그 후손들이 남원에 정착하였으며, 일부는 중앙의 정계에 나아가 활약하면서 당대 제1급의 명문(名門)을 형성하였다.윤위의 후손들은 남원시 용정동에 거주하며 세거하여 왔다. 그중의 일부가 일언, 즉 남원시 주생면 상동리에 16세기 후반 무렵부터 세거하기 시작하였으며, 사람들은 이들을 ‘일언윤씨’로 불러왔다.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64호인 무진정(無盡亭)이 남원시 대강면 방산리에 있다. 이 정자는 1751년 무진(無盡) 윤정근(尹廷根)이 선산 자락에 세운 것으로 본래의 이름은 무진장(無盡藏)이었다. 그는 방산 나루터에서 섬진강을 건너 남북으로 오가는 길손들이 쉬어가도록 이 정자를 지었다. 2015년 현재 인구는 42,423명으로 집계 되었다.<디지털남원문화대전에서 발췌>

2.남원윤씨(南原尹氏) 영사정(永思亭) 묘역
남원윤씨 영사정묘역은 경기도 김포시 고촌읍 신곡리에 있다. 2010년 4월 14일 김포시의 향토유적 제13호로 지정되었다.남원윤씨 판관공(은)파의 묘역으로 파의 시조가 되는 윤은(尹?,1447~1528)은 조선 중종 때의 군자감 판관으로 시영, 시호, 시걸 등 세 아들을 문과에 등과시켜 가문을 빛냈다. 영사정 묘역은 1529년 윤은공의 묘역이 현위치에 자리잡으면서 현재까지 종중에 의해 꾸준히 관리되고 있다. 16~19세기에 걸쳐 세대별로 조성한 묘표, 문인석, 망주석, 석양 등의 석물은 각 시대의 양식적 변화를 보여주며, 김노, 한호, 송시열, 윤덕준, 윤봉오, 황운조 등의 글씨가 남아 있다. 묘역 입구에는 정려각(旌閭閣)이 있는데 윤은의 후손 가운데 총11명이 정려를 받았으며 6명의 정려문이 전한다. 정려는 충신, 효자, 열녀 등을 표창하는 국가의 특전이다.<위키백과에서 인용>

3.남원윤씨(南原尹氏) 윤은(尹訔)
윤은(尹訔, 1447~1528)의 자는 화중(和仲)으로 부친은 선공감 봉사를 지낸 지득(之得)이며 조부는 함길도 도관찰출척사를 지낸 임(臨)이다. 관직은 음직으로 은계도(銀溪道) 찰방에 제수되었고, 옥과 현감, 군자감 판관(判官)에 이르렀다. 후손들이 현달하여 삼세추은(三世推恩)의 은택을 받아 좌승지로 증직되었다. 부인은 배천 조씨(白川趙氏)이다. 배천 조씨의 묘는 원래 김포 임촌리에 있었으나 윤은이 서거하자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묘소는 세장지 최상단부에 위치하며 윤은과 배천 조씨의 묘가 쌍분(雙墳)으로 조성되어있다. 묘소 조성 당시의 석물로는 윤은과 배천 조씨의 묘표 2기, 묘갈 1기, 망주석 1쌍, 문인석 1쌍 등이 배치되어있다. 근래 묘역을 정비하면서 비석 2기와 상석, 향로석 및 계체석을 새로 갖추었다.  윤은 묘표는 1530년(중종 30) 12월 20일에 건립한 것이 있었으나 훼손되었던 듯 1619년(광해군 11)년 2월에 대리석으로 다시 세웠다. 전후면 모두 마모가 심하여 몇몇 글씨를 제외하고는 판독하기 어렵다. 비좌는 화강암으로 만들었고, 뒷부분이 파손되어 비신과 맞닿는 부분을 시멘트로 보강해 놓았다. 비신 상단부의 이수(螭首)부분에는 구름무늬를 조각하였고 전면에는 구름무늬 윗부분에 초승달 모양을 후면에는 구름에 가려진 해를 조각해 놓았다.  배천 조씨의 묘표 역시 대리석 재질로 표면의 마모가 극심하여 판독하기 어렵다. 이수 부분에는 앞뒤 모두 구름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비좌는 중간에 침선을 돌렸을 뿐 별다른 문양은 없다. 후대에 비신과 비좌의 결합에 문제가 생기자 시멘트로 결합되어 있다.  묘갈은 1537년에 건립한 것이다. 이사균(李思均, 1471~1536)이 글을 짓고, 중종년간 명서예가로 활약한 김노(金魯, 1498~1548)가 글씨를 썼다. 비신은 대리석 재질로 글씨를 판독하기 어려울 정도로 마모가 심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수 부분은 교룡(蛟龍)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모양을 앞뒤로 조각하였는데 빼어난 조각 솜씨가 당대를 대표할만한 수작에 속한다. 비좌는 시멘트로 만들어 비신을 고정하였다.

4.남원윤씨(南原尹氏) 윤시영(尹時英)
윤시영(尹時英, ?~?)의 자는 언좌(彦佐)로 윤은의 장남이다. 1504년(연산군 10) 문과에 급제하였고 통훈대부 사간원 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손자 우신(又新)이 자헌대부에 올라 가선대부 예조참판으로 추증(追贈)되었다. 부인 진주 유씨(晉州柳氏)는 숙부인(淑夫人)이었다가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되었다.  묘소는 윤은의 묘 좌측 구릉 정상부에 위치하며 윤시영과 진주 류씨의 묘가 쌍분으로 조성되어있다. 옛 석물로는 윤시영 묘표와 진주 유씨의 묘표, 문인석 1쌍, 망주석 1쌍 등이 배치되어있다. 1997년 비석을 새로 제작하여 묘소 좌측에 배치하였으며, 상석과 혼유석, 계체석도 새로 마련하였다.  윤시영 묘표는 대리석 재질로 마모가 심하지만 통훈대부(通訓大夫), 증 가선대부(贈 嘉善大夫) 등의 글자가 판독된다. 이수 부분은 반원형으로 만들어 구름무늬를 새겨 놓았다. 진주유씨 묘표 역시 대리석으로 제작하여 마모가 극심하지만 “숙인진주유씨지묘(淑人晉州柳氏之墓), 증 정부인(贈 貞夫人)”의 비제가 확인되고, 후면에는 “경술십월이십사일입석(庚戌十月二十四日立石)”의 건립연대도 기록되어 있다. 이수 부분에는 구름무늬를 조각하고 전면에 초승달, 후면에는 해를 조각하였다. 윤시영 묘표의 이수 부분에 비해 방형으로 만들었다.<남원윤씨대종회에서 발췌: 경기도문화재전문위원  정해득님 자료>

 

문화재지정
김포시 향토유적 제13호
문화재명칭
남원윤씨(南原尹氏) 영사정(永思亭) 묘역
소재지
경기 김포시 고촌읍 신곡리 102-7
관리자(연락처)
남원윤씨 판관공파

 

▼ 남원윤씨(南原尹氏) 영사정(永思亭) 묘역 안내판

 

 

▼ 남원윤씨(南原尹氏) 영사정(永思亭) 묘역 위성사진

 

▼ 남원윤씨(南原尹氏) 판관공파 가계도

 

▼ 남원윤씨(南原尹氏) 영사정(永思亭) 묘역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들을 화중원(和仲園)이라 하여 모셔 놓았다. 화중(和仲)은 윤은선생의 자(字)이다.

 

 

▼ 남원윤씨(南原尹氏) 영사정(永思亭) 묘역에 있는 무명무묘선조위령비... 항일투사로 나가 전사하신 선조들을 기리는 듯...

 

 

▼ 남원윤씨(南原尹氏) 영사정(永思亭) 묘역 전경

 

 

윤은의 부친 봉사공 윤지득(奉事公 尹之得) 묘 바로가기

 

▼ 남원윤씨(南原尹氏) 영사정(永思亭) 묘역에서 제일 윗분인 윤은(尹訔)선생 묘 측경

 

 

▼ 윤은(尹訔)선생 묘갈

 

 

▼ 윤은(尹訔)선생 묘 전경

 

 

▼ 윤은(尹訔)선생 묘 석물...

 

 

 

 

▼ 윤은(尹訔)선생 묘 후경... 앞쪽 산이 묘역의 안산에 해당하는 전호산...  향(向)은 개화산에 맞춰져 있다.

 

 

▼ 윤은(尹訔)선생  장남인 윤시영(尹時英) 묘 전경

 

 

▼ 윤은(尹訔)선생  장남인 윤시영(尹時英) 묘갈

 

 

▼ 윤은(尹訔)선생  장남인 윤시영(尹時英) 묘 석물...

 

 

 

 

▼ 윤은(尹訔)선생  장남인 윤시영(尹時英) 묘 후경... 아침 일찍 찾아서 안개가 뿌옇다.

 

 

▼ 이곳 묘역에는 윤시영(尹時英)의 세 아들 윤청, 윤징, 윤식 묘가 다 있는데 윤징 묘만 올린다.

 

 

▼ 윤시영(尹時英) 차남 윤징 묘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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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