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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구선생 묘 및 삼세신도비(李廷龜先生墓 및 三世神道碑)

 

월사 이정구 묘역은 풍수문화답사 기본코스로 매년 여름, 겨울 방학 때 학우들과 함께 찾는 곳이다. 그런데 막상 블로그에는 2008년에 다녀와서 쓴 답사기만 존재하고 나머지는 모두 현장답사기 뿐이다. 그래서 지난 겨울에 다녀온 곳이지만 그때 눈이 하얗게 내려 운치가 있던 묘역을 여름철에 올려 시원한 맛을 느껴보고 싶어 지금 올린다.

답사기를 쓰려면 처음부터 사진을 거기에 맞춰 찍어야 하는데 겨울에 갔을 때 현장답사 용으로만 쓸 요량으로 자세한 사진을 남기지 못했다. 그래서 막상 사진을 찾아보니 원하는 사진이 없다. 그렇다고 예전에 다녀온 사진을 올리자니 눈 내린 묘역과 어울리지도 않아서 그냥 부족한 대로 올리니 이해 바란다.

이곳은 연안이씨 발복지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경기도 광주에 있는 이석형 묘와 함께 연안이씨의 대표 묘역이다. 이정구 부터 시작해서 아들 이명한, 손자 이일상까지 3대에 걸쳐 연속으로 대제학을 지낸 최초의 가문으로 삼한 갑족으로 불리운다. 삼한갑족으로 불리우는 가문은 연안이씨 이외에 광산김씨 김만기 가문, 대구서씨 서성 가문, 전주이씨 이경여 가문이 있다.

이정구 묘역은 뒤 현무봉이 삼태봉으로 아주 멋진 모양을 갖추었으며, 기운이 힘있게 내려오다 묘역에 이르러 커다란 바위를 깊게 만들어 혈증으로 매김하고 있다. 좌우 용호가 잘 감싸주고 있는데 현재의 물길은 좌선수로 왼쪽이 휑하니 터져 있어서 아쉽다. 아마도 예전 사격과는 많이 달라졌으리라 짐작이 간다.

이곳은 무엇보다 현재 안산에 전원주택단지가 들어서서 아름답던 안산이 망가지고 있다. 아마도 몇년 뒤에는 안산에 전원주택만 보일지도 모른다. 매년 가다보니 안산을 잠식하는 건물들이 눈에 띄게 늘고 있음을 실감한다. 현실적인 문제도 있겠지만 문화유산으로 보존하면서 주변 환경도 함께 유지되기를 희망해 본다.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이정귀(또는 이정구, 李廷龜, 1564년∼1635년)는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성징(聖徵), 호는 월사(月沙)·보만당(保晩堂)·치암(癡菴)·추애(秋崖)·습정(習靜),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연안.
연성부원군 이석형의 5세손으로 태어났다. 모친이 해산할 때 범이 문밖에 와 엎드려 있다가 선생이 태어난 뒤에야 돌아갔다. 사람들이 모두 신기해하면서 군자(君子)가 태어나 문명(文明)을 밝힐 상징이라고 여겼다. 1585년(선조 18) 진사가 되고, 1590년(선조 23)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에 들어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선조가 몽진을 떠나기 전날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위해 숙직을 하던 장인 예조판서 권극지가 급서하여 몽진길에서 떨어지게 되었다. 급히 장인의 장례를 치르고 가묘를 쓴 뒤 처자와 자신의 부친, 장모, 처제를 데리고 왕을 쫓아 따라갔다.
명나라 송응창의 요청으로 황신(黃愼) 등과 함께 뽑혀서 경서(經書)를 강의하여 학자로서 존경을 받았다. 그 후에도 자주 중국 사신들을 접대하며 말벗이 되었다. 그가 명에 갔을 때, 그곳 문인들의 요청으로 100여 장의 기행문을 모아 《조선 기행록》이란 책을 만들었다.
1598년 명나라 찬화주사 정응태가 '조선이 왜국을 유인해 명을 침략한다'는 무고를 올려 파란이 일었다. 당시 이 오해를 풀기 위해 조정에서는 정승인 유성룡 등 동인들을 사신으로 보내려 했으나 사태수습에 자신이 없던 유성룡은 이를 고사했다. 이에 서인인 백사 이항복이 정사, 젊은 이정구는 부사, 서기관으로 한호(한석봉)이 뽑혀 명나라로 떠나게 되었다. 월사의 문장력은 이때 빛을 발하는데 정응태의 모함에 맞서 무술변무주(戊戌辨誣奏)를 지어 정응태(丁應泰)를 파직시켰다. 이후 동부승지, 좌부승지, 병조참지, 공조참판, 동지중추부사, 호조참판, 호조판서, 예조판서, 우참찬, 경기도관찰사, 지의금부사, 이조판서 등을 지내면서 선조를 보필했다.
1608년(광해군 즉위) 유영경의 옥사 직후 정운원종공신 1등(定運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이후 병조판서, 대제학, 예조판서, 형조판서, 호조판서, 지중추부사로 우빈객, 지춘추관사 등을 겸했다.
1624년 이괄의 난 때 인조를 공주로 모시었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 왕을 강화로 모시었고, 화의하자는 의견에 반대하였다. 신흠, 장유, 이식과 더불어 조선 중기 4대 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벼슬은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음에도 삶은 검소하고 질박했다고 전해진다. 
《이정구선생묘 및 삼세신도비》는 경기도 가평군 상면 태봉리에 있다. 1984년 9월 12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79호로 지정되었다.<위키백과>


이정구선생묘(李廷龜先生墓) : 경기도 기념물 제79호
경기도 기념물 제79호. 봉분은 단분으로 부인 안동권씨(安東權氏)와의 합장묘이며, 높이는 220cm이고, 봉분 주위를 10개의 호석으로 둘렀다. 봉분 앞에는 묘비와 상석·향로석이 있다. 묘비는 비신(碑身)과 비좌(碑座)로 구성되어 있다.
상석 앞 좌우로 동자상·망주석·문인석이 각 1쌍씩 차례로 배열되어 있으며, 특히 문인석은 섬세하게 조작되어 있다. 묘 부근에 아들 명한(明漢), 손자 일상(一相) 등의 묘가 함께 있다.
묘 좌측 전방에 있는 삼세비(三世碑)에는 이정구의 신도비를 중심으로 좌측에 아들 명한, 우측에 손자 일상의 신도비가 안치되어 있다. 이정구신도비 비문은 김상헌(金尙憲)이 찬(撰)하고, 이경석(李景奭)이 썼으며, 김상용(金尙容)이 전액(篆額)을 써서 1656년(효종 7)에 건립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연안이씨 삼세신도비(三世神道碑)
연안이씨 삼세신도비는 이 정구, 이 명한, 이 일상(삼대 대제학)의 신도비이다. 이 정구의 자는 성징이고 월사는 그의 호이며, 본관은 연안이다. 그는 15세에 진사에 합격하였고 선조 23년(1590)에 27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임진왜란때에는 명과의 대외관계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국가적 난국을 타개하는데에 큰 공을 세웠으며 이후 호조판서, 예조판서, 좌의정, 우의정을 거치면서 순탄한 관료생활로 일생을 마쳤다. 이명한의 자는 천장이고, 호는 백연이며 본관은 연안이다. 선조 29년인 서기 1595년에 월사 이 정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22세에 증광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정자와 전적을 거쳐 대사헌, 대제학, 이조판서, 에조판서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고 시와 글씨에도 뛰어났다. 인조23년인 서기 1645년에 향년 51세에 영면 하였고 시호는 문정이며, 묘는 상면 태봉리 월사의 묘 위에 있다. 이일상의 자는 함경이요 호는 청호이며, 본관은 연안으로 1612년 7얼 28일 월사 이정구의 손자이자 이조판서 이명한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질이 뛰어나 신동이라 하였으며, 17세시에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나이가 연소하여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고 있다가 22세되던 해에 설서가 되면서부터 사관의 길로 들어가 검열을 거쳤으며, 효종으로 하여금 북벌계획을 수립토록 하는데 크게 기여 하였고, 1660년 현종이 임금에 오른뒤부터 대제학, 우참찬, 한성부판윤, 지의금부사, 춘추관사, 호조판서등 주요 요직을 거치다가 예조판서로 있을 때 향년 55세에 이르러 별세한 뒤 우의정에 추증되었다.<위키백과>

 

문화재지정 경기도 기념물 제79호
문화재명칭 이정구선생 묘 및 삼세신도비(李廷龜先生墓 및 三世神道碑)
소재지 경기도 가평군 상면 태봉리 산115-1번지
관리자(연락처) 연안이씨월사공파종중

 

▼ 이정구 선생 묘역(李廷龜先生墓域)

▼ 이정구선생묘 및 삼세신도비(李廷龜先生墓 및 三世神道碑)

▼ 이정구 선생 묘역에 위치한 연안이씨 정려문

▼ 이정구 선생 묘역 입구에 있는 신도비, 장판각, 정려문 위치 안내도

▼ 연안이씨 삼세신도비(三世神道碑)... 중앙이 이정구선생 신도비, 좌측(백호방)이 아들 이명한 신도비, 우측(청룡방)이 손자 이일상 신도비... 

 연안이씨 삼세신도비(三世神道碑)... 중앙이 이정구선생 신도비, 좌측(백호방)이 아들 이명한 신도비, 우측(청룡방)이 손자 이일상 신도비... 

 

 

월사집목판(月沙集木板)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3호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3호. 총 1,334매로, 목판의 크기는 가로 53cm 내외, 세로 28cm 내외, 두께 3cm 내외로 좌우 양쪽 끝에 홈을 판 나무를 끼워 몸체가 뒤틀리지 않도록 하였다. 판광(板匡)은 사주단변(四周單邊)으로 가로 30.5cm, 세로 21cm이고, 반엽(半葉) 10행에 한 행 10자이다.
『월사집』은 그가 별세한 1년 후인 1636년(인조 14)에 공주에서 문인 최유해(崔有海) 등에 의해 처음 간행되었고, 1688년(숙종 14)에 손자 이익상(李翊相)이 원집과 부록 68권을 경상도 감영에서 간행하였다. 그리고 1720년(숙종 46)에 증손자 이희조(李喜朝)가 별집 7권을 간행하였다. 중간본은 원집(原集)·부록(附錄)·연보(年譜)·별집(別集)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목판은 원래 대구 용연사(龍淵寺)에 보관되어 있던 것을 1928년에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이원리로 옮겨와 없어진 300여 판을 새로 새겨 넣었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다가, 1984년에 경기도 가평군 상면 태봉리에 있는 이정구의 묘역 옆에 장판각(藏板閣)이 건립됨에 따라 경기도로 이관되었다.
이 목판은 경기도 가평군 상면 태봉리의 연안이씨 관동파(館東派) 종중에 소장되어 있고,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3호로 지정되어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월사집목판(月沙集木板) 안내문... 

 월사집목판(月沙集木板)과 변무주 안내문 

 월사집목판(月沙集木板) 장판각 현판과 좌우에 소개해 놓은 액자를 한꺼번에 만들어봤다.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선생 묘 안내문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선생 묘역... 뒤로 보이는 현무봉이 삼태봉으로 아주 근사하다.

눈 내린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선생 묘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선생 묘 근경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선생 묘표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선생 묘 방문 시각이 이른 아침이어서 그림자가 유난히 길게 보인다. 학우님들이 눈 위에 야초실용풍수지리학회의 이름을 써 놓았다.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선생 묘 후경

 월사선생 묘 위에는 손자 이일상(一相) 묘... 이른바 역장인데... 현지 안내문에는  역장의 이유를 자손의  수난이나 화를 면하기 위한 풍수지리 사상의 한 유형이라고 적혀있다. 무슨 이유 댈 만한 것이 없으면 전부 풍수지리로 덤태기로 떠넘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 당시에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인데 역장의 개념이 도입된 것은 임진왜란 이후의 일이다. 그 전에는 역장의 개념이 희미했다. 이정구선생 묘를 너무 아래쪽에  쓰다보니 아들, 손자가 들어갈 자리가 없어서 위쪽으로 쓴 것 뿐이다. 자리는 이정구 묘역이 정혈이다.

 월사 손자 이일상(一相) 묘표

 월사 손자 이일상(一相) 묘 전경

 월사 손자 이일상(一相) 묘 측경... 뒤에 보이는 묘가 월사 아들 이명한 묘

 월사 손자 이일상(一相) 묘 후경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선생 묘역 맨 상단에는 월사의 아들 이명한(明漢) 묘가 있다.

 월사(月沙)의 아들 이명한(明漢) 묘

 월사(月沙)의 아들 이명한(明漢) 묘 근경

 월사(月沙)의 아들 이명한(明漢) 묘표

 월사(月沙)의 아들 이명한(明漢) 묘 후경

 월사(月沙)의 묘역 입수도두 옆으로 깊게 박힌 바위가 기운이 흩어지는 것을 막고 있는데 혈증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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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