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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부원군(日城府院君) 정운관(鄭云瓘)

 

임고서원(臨皐書院)을 방문하는데 성역화하여 볼거리가 아주 많다. 그런데 정작 서원 안으로는 코로나 때문에 입장할 수가 없다. 밖으로만 돌아다니다 한켠에 있는 계현제(啓賢齊)를 발견하고 그곳이 정몽주 선생 부친을 모신 재실이란 걸 알고 묘소를 찾아 나섰다.
초가을 날씨가 스산한 가운데 평일이라 아무도 없는 산길을 차를 끌고 갔는데 차 한 대가 겨우 통과할만한 길이라 중간에 누구라도 마주치면 낭패다 싶었는데 다행히 만나는 사람은 없었다. 묘역 끝까지 차가 갈 수 있도록 포장되어 있어서 잘 다녀올 수 있었다. 주말이나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때는 차로 진입하는 것은 신중해야 할 듯 하다.
묘역 입구에서 바라보니 잘 생긴 현무가 뒤쪽을 가려주고 묘역을 안아주고 있다. 묘역을 오르면서 안산을 바라보니 근사하게 앉아있다. 그런데 안산을 잘못 보면 봉우리에 향선을 맞추게 되어 있다. 실은 두 봉우리 사이가 향(向)이다.
날이 스산해서 입수룡을 밟지 못하고 지도로 대신했다. 다른 포스팅을 참고하려고 여기저기 뒤졌더니 몇 군데서 멀리 자호천 물길이 직충(直冲)을 하여 아들 정몽주가 비명에 갔다고 되어 있고 그것도 임좌(壬坐)로 묘를 써서 임자년(壬子年)에 화를 입었다고 한다. 조금은 억지스런 주장이라고 생각 된다. 
혈은 좌우 지각이 발달되어 그 안쪽으로 점혈하는게 맞는데 일부에서 처럼 영천이씨 묘 중간에 써야 한다고 하는 것은 무리인듯 보인다. 여기서 앞선 답사자들의 의견에 반박하려는게 아니니 그냥 나만의 답사기를 적으니 이해 바란다. 다만 한가지... 이미 나와있는 결론에 일부러 짜맞추려고 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물길은 잘 갈무리가 되어 있고 백호 본신이 안산을 이루었는데 배를 내민 것이 좀 흠이되는 것 같다. 
일성부원군 묘 아래쪽에는 영천이씨 이부(李桴)의 묘가 있는데 외가쪽 사람으로 포은선생이 사망할 때 부관참시를 피하려고 이 묘를 평장으로 하여 오랫동안 유지했었는데 그때 외가인 영천이씨들이 묘를 관리하고 실전되지 않도록 한 노고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나는 묘지답사 할 때마다 뱀하고 인연이 많은데 이 맘 때는 뱀이 거의 들어가서 안 보여 맘 놓고 답사하는 편이다. 영천이씨 묘 앞에 뱀이 긴 허물을 벗어 놓은 게 보여 가슴을 쓸어 내렸다.ㅎ

 

일성부원군(日城府院君) 정운관(鄭云瓘)
 
포은 정몽주선생의 부. 일성부원군(日城府院君)
부(父)는 증밀직부사 유(裕), 조부(祖父)는 증개성윤 인수(仁壽), 증조부(曾祖父)는 판도판서 림(林), 고조부(高祖父)는 진현관제학 종흥(宗興)이다. 선생은 향시 과거에 합격한 뒤 성균복응제생의 벼슬에 올랐으며 뒤에 아들인 포은 정몽주가 귀하게 되어 신덕수의성근익조공신에 벽상삼한삼중대광으로 수문하시중 판병조사상호군영경령전사 일성부원군에 증직되었으며, 부인 이씨는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에 봉해졌다.
슬하에 네명의 자손을 두셨는데 장남이 포은 정몽주, 둘째가 정과(鄭過)로 벼슬이 예조판서이며, 셋째가 정후(鄭厚), 넷째가 정도(鄭蹈)로 벼슬이 사재령판서로 1392년 임신 4월에 둘째인 정과(鄭過)와 함께 이성계의 반정세력에 의해 포은께서 선죽교에서 순절시 함께 화를 당하셨다.
선생은 고려 공민왕 4년(1355,을미) 1월에 돌아가셨는데 이때 포은이 19세 되던 해였다. 포은은 이때 영천 도일동에 장사를 지내고 묘소에서 3년동안이나 여묘살이를 하였다.
선생의 묘소는 임란병화로 허물어졌다가 중세들어 이 고을 군수인 한덕(外派孫)이 알고 표석을 만들어 세웠으며 후에 10세 종손인 현감 정운한(鄭雲翰)과 9세손 정익이 다시 비석을 세웠다.
<연일(延日,迎日,烏川)정씨(鄭氏)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사이트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미지정
문화재명칭 일성부원군(日城府院君) 정운관(鄭云瓘) 묘
소재지 경북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 산31-1(네비:양항리 736)
관리자(연락처) 연일(延日,迎日,烏川)정씨(鄭氏)

 

▼ 일성부원군(日城府院君) 정운관(鄭云瓘) 묘 용맥도

 

▼ 일성부원군(日城府院君) 정운관(鄭云瓘) 묘 용맥도... 멀리 자호천이 치고 들어오는 것은 묘역에서 보이지 않을 뿐더러 거리도 상당하다.

 

▼ 일성부원군(日城府院君) 정운관(鄭云瓘) 묘를 오르는데 안내목이 여러개 설치되어 찾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다.

 

▼ 일성부원군(日城府院君) 정운관(鄭云瓘) 묘 측경

 

 

▼ 일성부원군(日城府院君) 정운관(鄭云瓘) 묘표... 묘표 전면에 후손 누가 세웠다고 쓴 것은 별로 못본것 같다.

 

▼ 일성부원군(日城府院君) 정운관(鄭云瓘) 묘표 후면

 

▼ 일성부원군(日城府院君) 정운관(鄭云瓘) 묘표... 새로 세운듯 보인다.

 

▼ 묘표를 자세히 살펴보지는 못했다.

 

▼ 일성부원군(日城府院君) 정운관(鄭云瓘) 묘 망주석... 망주석이 특이하다.

 

 

▼ 일성부원군(日城府院君) 정운관(鄭云瓘) 묘

 

▼ 정운관(鄭云瓘) 묘 입수도두

 

▼ 정운관(鄭云瓘) 묘 청룡방 후경

 

▼ 정운관(鄭云瓘) 묘 백호방 후경

 

▼ 정운관(鄭云瓘) 묘 안산... 두 봉우리의 가운데에 맞춰서 형세적인 향법에 맞췄다. 따라서 안산이 알봉 운운하는 것은 억지다.

 

▼ 정운관(鄭云瓘) 묘 측경

 

▼ 정운관(鄭云瓘) 묘와 현무정... 묘역이 넓고 전순이 짧아 한장의 사진으로 찍기가 어렵다.

 

▼ 정운관(鄭云瓘) 묘 전면 백호방

 

▼ 정운관(鄭云瓘) 묘 전면 청룡방

 

▼ 정운관(鄭云瓘) 묘와 앞쪽 영천이씨 이부 묘...

 

▼ 정운관(鄭云瓘) 묘 아래에 있는 외가쪽 사람인 영천이씨 이부(李桴) 묘

 

 

 

▼ 정운관(鄭云瓘) 묘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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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