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22. 6. 1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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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조판서 이극감(李克堪) 묘(이인손 차남, 이준경 증조부)

 

충주답사를 하는데 비가 억수로 내려 잠시 쉬어갈 참으로 박물관을 찾았는데 하필이면 월요일 휴관일이라 들어가지 못하고 인근의 중앙탑(충주 탑평리 칠층석탑,국보6호)을 둘러본 후 점심을 먹고 시간을 벌었다. 그랬더니 오후에는 비가 개이고 화창한 날이 되어 답사를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점심 후 먼저 찾은 곳은 이극감 묘이다. 차로 진입하는데 국세가 잘 짜여진 곳에 왕릉같은 봉분이 눈에 들어온다. 오르니 완벽한 관쇄가 되고 수구가 꽉 막힌 보기드문 곳이다.

이극감은 세조 때 예종의 스승으로 세조의 각별한 신임으로 승승장구하다 일찍 요절하여 관직은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손자 대에 연산군의 갑자사화로 큰 화를 입었으나 증손자가 영의정 이준경으로 이곳의 묘발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조안산의 고축사도 보기 좋다. 다만 청룡이 다소 멀고 백호가 다가와 있어 친손들의 어려움도 예상되는 대목이다.

 

형조판서 이극감(李克堪)
 
1427년(세종9)-1465년(세조11) 자는 덕여(德輿) 호는 이봉(二峯) 광성군(廣城君), 시호는 문경(文景)
광주 이씨로, 한양 교동(校洞)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문과에 급제한 뒤 집현전에 들어갔다. 문과 중시(重試)에 합격해 부수찬이 되었고 세자시강원에 들어가 세자를 가르쳤다.
세조 6년에 국왕은 "내가 세자를 너에게 부탁하니 네가 잘 보필하면 나는 걱정이 없겠다"고 했고 이듬해에는 "경은 세자의 스승이라 내가 믿고 중시하는 바이다"라 했을 정로도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그는 도승지, 이조참판을 거쳐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부모 상을 번갈아 당한 뒤 1465년(세조11)에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사후 2년 뒤인 1467년(세조13)에 좌익공신 3등으로 광성군에 봉해졌다.
그는 총명함이 남달라 한 번 본 내용은 모두 기억했고 깨끗한 처세로 명성이 높았는데 한 번도 술을 가지고 손님을 접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집에서 술을 담그지도 않았다.
이극감보다 열 살이 많았던 세조는 경우에 따라서는 군신 관계를 떠나 친구처럼 그를 대했다.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세조는 자신의 아들인 후일의 예종을 그에게 맡겼다. 그리고 국가의 중요한 의사 결정이나 즐거운 일이 있을 때면 그에게 임무를 부여하고 기쁨을 함께 했다.
그는 국왕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아 38세에 형조판서에 임명됐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년 뒤에 왕위에 오른 예종은 이극감에게 보은하지 못했다. 만약 이극감이 조금만 더 오래 살았더라면 정승의 반열에 올랐을 것이다.
학문이 높고 높은 관직에 올랐다고 하더라도 문장에 있어서는 주목 받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이극감은 명문장가로도 이름이 높았다 한다. 다만 그의 문집조차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문학적 소양을 가늠할 기초적 자료가 거의 없어 안타깝다.
다행히 사가 서거정이 편찬한 '동문선(東文選)'에 그의 시 몇 수가 올라 있어 어렴풋이나마 명문장의 일면을 볼 수 있다. 그중 한 수를 소개한다.​

강가에 눈 녹아 강물 불었는데 江上雪消江水多
밤 들자 수심가 소리 들려오네 夜來聞唱竹枝歌
님과 이별한 슬픔 어찌 다하랴 與君一別思何盡
애절한 마음 저 물에 실어보내네 千里春心送碧波​

고려의 대시인 정지상(鄭知常)의 시를 생각나게 하는 명작이다.

몸이 원최 약했는지 세조가 그 몸으로 파리 한 마리라도 잡을 수 있겠냐며 놀려댔고 이에 이극감이 나라의 큰일도 문제없다고 말하는데 당시 세자인 예종의 스승이었는데 이 때문에 세조가 "넌 세자에게 도덕이 아니라 어깨 솟은 것을 가르쳤을 뿐이 아니냐" 라고 또 놀려대며 제조로 삼아 소반과 밥그릇을 들게 하여 어깨를 펴려고 한다며 웃었다고 한다(...)

세조는 왕권을 강화하고 문물 제도를 정비함과 아울러 활발한 출판 사업을 펼친 왕이었다. 특히 1403년(태종 3)에 만들어진 조선 최초의 금속활자인 계미자(癸未字)와 1455년 (세종 원년) 을해자(乙亥字, 강희안 자) 이후 정축자(丁丑字, 세조3, 1457), 무인자(戊寅字, 세조4, 1458), 을유자(乙酉字, 세조11, 1465, 일명 정난종 자) 등 수 차례에 걸쳐 금속활자를 만들어 출판에 활용했다.​

이 시기에 이극감은 뛰어난 학문과 문장력, 세조의 신임을 바탕으로 출간 사업을 주도했다. 당시 실록 사료를 보면, 그는 참으로 정력적인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주요한 업적은 신숙주, 한계희, 강희맹 등 당대를 대표하는 이들과 함께 신찬국조보감(新撰國朝寶鑑)을 찬술해 간행한 일이다. 또한 치평요람(治平要覽)과 의서(醫書)인 의방유취(醫方類聚)의 교정에 참여했으며, 초학자회(初學字會)의 언문(諺文) 주(註)를 다는 일, 명황계감(明皇誡鑑) 언해, 불경(不經) 언해사업 등에도 간여했다.​

세조는 치평요람이 "정인지가 잘못된 것을 고치기는 했지만 추솔(麤率)해 정밀(精密)하지 못하다"고 지적하고 그 일의 마무리를 이극감에게 맡겼다. 이는 그의 학문적 깊이와 교정 능력을 동시에 알게 해주는 충분한 근거다. 다만 그의 진면목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줄 문집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 아쉽다.

광주 이씨의 명성은 조선 중기의 명문 해평 윤씨의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 1537-1616)가 쓴 '월정만필(月汀漫筆)'에도 보인다. 광성군 이극감 집안은 8대를 연이어 문과에 급제했으며, 그의 아들 광양군 이세좌의 아우인 이세우(李世佑)의 집은 9대를 연이어 문과에 합격했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세조로부터 예종을 거쳐 성종 대에 이르기까지 '팔극조정(八克朝廷)'이라는 말이 세상에 회자(膾炙)되었다. 조정에 벼슬하고 있는 극(克)자가 들어간 광주 이씨 집안 종반(從班)들이 무려 8명에 달해 당시 국정을 쥐락펴락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청백리에 녹선된 둔촌 이집의 둘째 손자의 둘째 아들이 바로 이극감이다. 이극감의 증손자 중에는 이연경, 윤경, 준경 등과 같이 역사에 이름을 날린 인물만도 여럿이다.
소위 팔극의 자손들 가운데 둘째집인 극감의 후손들은 광주 이씨가 16세기 때 사림파(士林派)와 관계를 맺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극감의 아들인 이세좌와 손자 4형제는 함께 갑자사화로 화를 입었다. 그러나 그의 증손자들인 이연경과 윤경, 준경, 약수, 약해, 약빙 대에 이르면 정암 조광조, 모재 김안국, 청송 성수침, 퇴계 이황, 남명 조식 등과 학문적인 유대관계를 굳건히 해 사림의 명가로 거듭날 기반을 마련했다.

이극감의 맏아들인 세좌는 1482년(성종13) 8월 16일 좌승지로 사가에 있는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들고가 왕명을 집행한 장본인이다. 이 일 때문에 연산군의 분노를 사, 막내 삼촌인 이극균과 자신 그리고 아들 4형제를 포함한 광주 이씨 30여명이 함께 극형에 처하게 된다. 명문 광주 이씨의 문중이 누란(累卵)의 위기를 맞았던 사건의 중심에 이극감의 아들 세좌가 있었던 것이다.
1504년 갑자사화가 있은 2년 뒤 중종 반정이 있었고 이세좌의 손자 대에 이르러 광주 이씨 집안은 명실상부하게 재기한다. 그 배경에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사림파와의 밀접한 관계가 크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나무위키>

 

문화재지정 미지정
문화재명칭 형조판서 이극감(李克堪) 묘
소재지 충북 충주시 동량면 대전리 산90-1번지
관리자(연락처) 광주이씨

 

▼ 형조판서 이극감(李克堪) 묘 원경

 형조판서 이극감(李克堪) 묘와 재실 '이봉재'

 형조판서 이극감(李克堪) 묘 용맥도

 형조판서 이극감(李克堪) 묘 전경

 형조판서 이극감(李克堪) 묘 상석과 묘비...

 형조판서 이극감(李克堪) 묘비... 묘비는 큰데 글자는 왜이리 작게 보일락말락 써놓았는지... 이것도 갑자사화의 영향이 아닌가 싶다.

 형조판서 이극감(李克堪) 묘 석물...

이극감(李克堪) 묘 옆에는 비신이 없는 묘비가 있다. 아마도 신도비가 아닌가 싶다.

이극감(李克堪) 묘 측후경... 앞쪽으로 물이 나가는 수구처가 된다.

 이극감(李克堪) 묘 입수처...

 이극감(李克堪) 묘 후경... 비 온 뒤라 조산이 보이지 않는다.  아래 정통풍수지리학회에서 인용한 사진과 비교해 보면 된다. 앞쪽에 멋드러지지는 않지만 고축사가 있는 것도 후손들 발복과 영향이 있다.

 

 이극감(李克堪) 묘 아래에는 7대손 이계도 묘가 있다.

 이극감(李克堪) 7대손 이계도 묘비와 석물.

 이극감(李克堪) 7대손 이계도 묘 후경...

 이극감(李克堪) 묘 입구에는 재실 이봉대가 있다.

 이봉대 현판이 특이하다.

 

야초 묘지답사의 주소를 금년 6월1일부터 인근지역까지만 공개하도록 변경되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더라도 조금만 살펴보시면 다 알수가 있습니다.
이미 올린 내용도 수정할 때는 새로운 주소공개 원칙에 따라 수정할 예정입니다.
너른 이해를 바랍니다.  
야초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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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