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22. 3. 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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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호호수생태원, 충효동 왕버들과 정려비각, 김덕령생가터

 

소쇄원을 나와 시간을 보니 해가 넘어가려면 약30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다른 정자를 찾아갈까 하다가 인근에 있는 광주호호수생태원을 가기로 했다. 이곳에는 충효동 왕버들과 정려비각, 김덕령생가터가 있어서 좀 서둘러야 다른 유적지를 볼 수 있었다. 마침 봄비가 주룩주룩 내린 때라 여러가지로 힘들었지만 다행히 일정을 잘 소화했다.

이곳은 주차장이 아주 넓게 잘 갖춰져 있어서 누구라도 쉽게 접근이 가능하다. 먼저 충효동 왕버들과 정려비각을 둘러보고 김덕령생가터는 언덕에 있어서 호수생태원을 보고난 뒤 시간이 허락하면 들르기로 하였다.

충효동 왕버들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데 수형이 아주 아름답다. 원래 마을 입구에 이런 왕버드나무를 심는 이유는 강을 통해 마을로 바람이 치고 오는 것을 막는 비보풍수 개념으로 나무를 심었는데(이를 동수비보라 함) 시간이 흐르면서 고목이 되어 지금까지 약400여년을 버티어 온 노거수로 자리잡고 있다. 원래는 다섯그루를 심었다고 하는데 한그루는 고사했고 다른 한그루는 길을 내면서 소나무 한그루와 함께 잘려나갔다고 한다.

충효동 정려비각은 이곳이 김덕령생가가 있던 마을인데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김덕령(1567∼1596)과 그의 부인 흥양 이씨, 그의 형 김덕홍(1558∼1592), 그의 아우 김덕보(1571∼1596) 등 일가족의 충효와 절개를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마을 앞에 세운 비석과 비각이다. 이 마을 이름이 충효리인데 이는 정조 임금이 직접 마을 이름을 지어 내려주었다. 

광주호 호수생태원은 호숫가에 데크시설을 하여 자연학습장, 수변 습지 등 테마별 단지로 조성된 생태공원이다. 방문할 때는 비가 내려 여유로운 탐방이 힘들었지만 날씨가 좋을 때는 휴식처로 매우 좋은 곳이다. 광주시내에서 약 30분 정도 거리에 있다니 시민들의 사랑을 많이 받아 가족 나들이로 적합하리라 생각된다. 또한 가족이 이곳 충효리의 내력을 보고 충과 효의 의미를 되새겨 볼 기회를 얻는 것도 좋을듯 싶다.

 

 

 

광주 충효동(光州 忠孝洞) 왕버들 군(群)
 
2012년 10월 5일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32그루가 지정되었는데 추정 수령은 약 400년이다.
각 나무의 크기는 왕버들 1(나무높이 9m, 가슴높이 줄기둘레 6.25m, 수관폭11.5×18.9m) , 왕버들 2(나무높이 10m, 가슴높이 줄기둘레 5.95m, 수관폭 14.0×14.0m), 왕버들 3(나무높이 12m, 가슴높이 줄기둘레 6.30m, 수관폭 16.6×27.0m)이다.
이 왕버들 32그루는 원래 일송일매오류(一松一梅五柳)라 하여 마을을 상징하는 경관수였다고 한다. 그런데 매화와 왕버들 1그루는 말라 죽었으며 또 한 그루의 왕버들과 소나무는 마을 앞 도로를 확장하면서 잘라버려 지금은 왕버들 3그루만 남아있다. 마을에서는 다시 왕버들 2그루를 심었으며 소나무와 매화도 계속 심을 계획이라 한다.
충효동의 역사는 분명치는 않으나 예부터 성(城)이 있어 성안 또는 석저촌(石低村)이라 불렀다. 이 일대는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양산보(梁山甫)의 소쇄원(瀟灑苑)을 비롯하여 김윤제(金允悌)의 환벽당(環碧堂), 김성원(金成遠)의 식영정(息影亭)과 서하당(棲霞堂 ) 등의 원림(苑林) 정각(亭閣)이 많이 있어 주변 조경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곳이다.
이 나무들도 이 무렵 조경을 위하여 심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왕버들은 버드나무과의 낙엽활엽큰키나무로 가장 몸집이 크게 되는 버들속의 나무이고 장수하는 까닭에 전국에 노거목이 많은 편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광주 충효동 왕버들 군은 충효마을의 상징숲이자 비보(裨補)숲으로 조성되었으며, 김덕령 나무라고도 불리우는 등 나무와 관련된 유래나 일화들이 잘 전해지고 있어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크다.
또한 수령이나 규모면에서 현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되고 있는 왕버들과 비교했을 때 우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수형 및 수세 또한 양호한 편으로 생물학적 가치도 크다.<문화재청>


광주호 호수생태원
 
광주호(光州湖)의 호숫가 인근에 184,948m²의 부지에 자연관찰원, 자연학습장, 잔디휴식광장, 수변 습지 등 테마별 단지로 조성된 생태공원이다. 광주시내에서 약 30분 정도 거리에 있어, 시민들이 찾기가 좋아 2006년 3월에 개장한 후 아이들의 자연생태학습장이자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이용된다.

전체적으로 조용하고 시원한 느낌을 받는 공원으로, 추운 날씨가 아니라면 꽃이나 동·식물들의 생태자료를 직접 볼 수 있다. 진달래, 개나리, 자산홍, 장미, 철쭉, 수국 등 형형색색의 야생화 17만 본이 심어진 테마별 꽃단지와 부엽식물원, 수변부 관찰 테크, 암석원, 그리고 때죽나무, 모과나무, 벽도동, 단풍나무 등 3,000여 그루의 나무 등이 볼만하다. 늪지에서 각종 새가 실제로 부화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메타세콰어이 양편 가로수 사이로 목재계단을 조성하였다.<대한민국구석구석>

 

문화재지정 천연기념물 제539호
문화재명칭 광주 충효동(光州 忠孝洞) 왕버들 군(群)
소재지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1021
관리자(연락처) 광주광역시 북구청 

 

▼ 광주 충효동(光州 忠孝洞) 왕버들 군(群)

▼ 광주 충효동(光州 忠孝洞) 왕버들 군(群) 안내문... 이 왕버들은 일명 '김덕령 나무'라고 전해온다.

▼ 광주 충효동(光州 忠孝洞) 왕버들 군(群)

▼ 이곳에 말무덤이 있다. 전국에 가다보면 말무덤이라고 전해오는 무덤이 많은데... 대부분은 마총(馬塚)인데 이곳처럼 마을 입구에 있는 경우는 비보용의 조산(造山)인 경우가 많다. 경북 예천에 마을 입구에 말무덤(言塚)이 있는데 나쁜 말을 하지말라는 경고의 의미로 만든 곳도 있다. 경북 예천 언총 바로가기

▼ 광주호 호수생태원... 입장료는 없다.

▼ 광주호 호수생태원 안내도...

▼ 광주호 호수생태원을 걷다보면 좋은 글구도 만난다.

▼ 광주호 호수생태원

▼ 광주호 호수생태원 산책로

▼ 광주호 호수생태원은 정성스럽게 잘 가꾸어져 있다.

▼ 광주호 호수생태원 산책로에는 뱀이 자주 나오나보다.

▼ 광주호 호수생태원은 호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호숫가 풀숲은 새들이 보금자리를 튼다고 한다.

▼ 광주호 호수생태원 강 건너쪽은 담양... 식영정이 보인다고 하는데 비가 내려 그냥 지나쳤다.

▼ 광주호 호수생태원에 새로 만들어진 판문점 도보다리 재현품... 남북정상회담을 기념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 광주호 호수생태원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을 많이 만들어 놓았다.

 

충효동정려비각(忠孝洞旌閭碑閣) : 광주광역시 시도기념물 제4호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4호.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김덕령(1567∼1596)과 그의 부인 흥양 이씨, 그의 형 김덕홍(1558∼1592), 그의 아우 김덕보(1571∼1596) 등 일가족의 충효와 절개를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마을 앞에 세운 비석과 비각이다.
김덕령은 그의 형이 고경명의 지휘 아래 참전한 금산전투에서 전사하자 상중(喪中)인데도 의병을 모집하여 왜군의 전라도 진출을 막기 위해 진해와 고성 등지에서 싸웠다. 그러나 이몽학의 반란에 연루되었다는 모함으로 혹독한 고문 끝에 20일만에 옥사하였다. 그의 부인 이씨는 정유재란 때 추월산에 피신해 있다가 일본군의 추격을 받고 순절하였다. 또한 그의 동생은 두 형을 잃고 전쟁 후에 잠시 장릉참봉이란 벼슬을 지냈을 뿐 벼슬을 사양하고 은거생활을 하였다.
이 비는 정조 13년(1789) 세운 것으로 높이 220㎝·너비 68㎝이며, 위쪽에는 비각을 얹어 놓았다.
비각은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이며 삼문과 담장이 둘렀다. 특히 비석의 뒷면에는 김장군 일가의 충·열·효에 대한 칭찬의 글 뿐 아니라 ‘충효지리(忠孝之里)’라는 동네 이름까지 임금이 직접 지어 내렸다는 내용이 써있어 특이하다.<문화재청>

충효동 정려비문(忠孝洞旌閭碑文)

옛날에 충용장군(忠勇將軍) 김덕령 공이 초야에서 일어나 의병을 일으켜 흉악한 왜적을 막아냈다. 위엄과 명성이 일본에까지 진동하였으나 불행하게도 뜻밖의 화를 당하여 죽었다. 그의 형 덕홍도 금산(錦山) 전투에서 먼저 죽었고 부인 이씨도 외적을 만나 절개를 지키며 죽었다. 충(忠)과 열(烈)이 한 집안에 모였는데도 억울한 원한이 풀리지 못하고 아름다운 빛이 나타나지 못하니 군자들이 슬피 여겼다. 
현종 임금께서 비로소 공의 원통함을 씻어주고 병조참의를 추증하였으며, 숙종 임금께서는 병조판서를 가증(加增)하고 의열(義烈)이라는 사액을 내려 주셨다. 지금 임금께서는 무신년(1788년)에 좌찬성을 또 가증하고 충장이라는 시호를 내려 주셨으며, 이씨에게는 정경부인을 추증하시고 덕홍에게도 지평(持平)을 추증하셨다. 이어 공의 고향 마을을 충효리라 이름 지어주시고 비석을 세워 표시하기 위하여 신 서유린(徐有隣)더러 비 뒷면을 기록하라고 명을 내리셨다. 신이 명을 받고 송구스러워 하며 물러나와 생각해 보았다. 
국가에 큰일이 있게 되면 하늘은 반드시 난국을 건질만한 인재를 낳아서 대비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가와 질투에 걸리지 않고 성공한 사람은 적다. 더구나 공처럼 불행한 분은 더욱 그러하다. 세상에서 공을 원통하게 여기는 이들은 항상 공을 악무목(岳武穆: 송나라의 충신 악비(岳飛))과 비교한다. 하지만 무목은 언성(郾城)대첩이라도 있었지만 공은 의병을 일으킨 초기부터 이미 뜻을 품은 채 무기를 준비하였으나 권력자들의 방해를 받아 백에 하나도 써보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터무니없는 트집으로 죽고 말았으니 공을 무목처럼 죽게만 하였어도 다행이었을 것이다. 아! 하늘이 공을 낳은 것이 지사들에게 분통만을 남겨주자는 것이었는가? 
그러나 여러 임금께서 원통함을 씻어 표창해 주시어 거의 유감이 없게 하였으니 시호나 정표(旌表)가 모두 특별한 은혜에서 나왔다. 충신이 훌륭한 대우를 받는 것이 어찌 생사에 따른 차이가 있겠는가? 공의 아우 덕보에게도 지행(志行)으로 집의(執義)를 추증하여 세 형제를 의열사(義烈祠)에 함께 모시게 하셨다. 국가의 위로가 김씨에게만 치우친 듯하나 이는 오직 충용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성군의 덕화(德化)가 널리 나타나 숨겨진 일들이 모조리 밝혀져 억울함이 벗겨진 것 중에서도 공은 실로 으뜸을 차지한다. 크고 두꺼운 비석에 대서특필하니 일들이 모조리 밝혀져 억울함이 벗겨진 것 중에서도 공은 실로 으뜸을 차지한다. 크고 두꺼운 비석에 대서특필하니 단청처럼 빛나고, 한때에 굽혀졌던 일이 백세에까지 펴지게 되었으니 공의 가문에만 영광이겠는가? 
충은 반드시 효에서 근본하니 공이 집에서 효도한 것이 바로 나라에 충성하게 된 것이다. 더구나 형이 앞에 죽고 아내가 뒤에 죽어 한 집안의 충렬이 진실로 한 나라의 중히 여긴 바가 되었으니 이것도 효도에서 나온 것이다. 마을의 정표(旌表)를 충렬(忠烈)이라 하지 않고 충효라고 한 것은 임금의 뜻이 이와 같았기 때문이다. 훗날 이 정려(旌閭)에 경의를 나타내고 이 비석을 읽는 사람들은 어찌 효도에 먼저 힘쓰지 아니할 것인가? 삼가 써서 후세에 알리노라.  
1789년(정조13년) 음력 삼월<현지 안내문 인용>

 

▼ 충효동정려비각(忠孝洞旌閭碑閣)

▼충효동정려비각(忠孝洞旌閭碑閣)... 비의 앞면에는 ‘조선국 증 좌찬성 충장공 김덕령 증 정경부인 흥양 이씨 충효지리(朝鮮國贈左贊成忠壯公金德齡贈貞敬夫人興陽李氏忠孝之里)’, 뒷면에는 김덕령 일가의 충효열에 대한 찬양과 정조 임금이 직접 마을 이름을 지어 내렸다는 충효리의 유래가 적혀 있다.

▼충장공 김덕령 장군 생가터 이정표

▼충장공 김덕령 장군 생가터 사당

▼충장공 김덕령 장군 생가터

▼충장공 김덕령 장군 생가터... 생가터 안내문

▼충장공 김덕령 장군 생가터에서 바라본 충효리...

▼충장공 김덕령 장군 생가터 표석

▼충장공 김덕령 장군과 부인 흥양이씨 사당

▼충장공 김덕령 장군 생가터 원경

이곳 광주 북구 충효리는 충장공 김덕령 장군 생가가 있던 곳으로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이곳에 광주호호수생태원이 조성된 것도 의미가 있다. 가족끼리 이곳을 다녀가시면 충효리의

내력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가정교육의 산장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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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