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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부(茶父) 이한영 생가(李漢永生家)와 강진다원
녹차밭은 보성의 녹차밭만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강진을 답사하면서 월출산 아래 강진쪽에 녹차밭이 넓게 펼쳐진 것으로 보았다. 강진에서 무위사를 찾아 가는 길에 배가 출출해서 식당을 찾다가 우연히 알게 된 강진 녹차밭과 그 인근에 이한영 생가, 월남사지 등을 뜻하지 않게 답사할 수 있어서 행운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4월초의 강진녹차밭 인근에는 유채꽃을 일부러 심어서 들판이 노란 색으로 변해 아주 멋드러진다. 점심은 뒷전이고 식당 입구에 있는 유채밭을 한참이나 헤집고 돌아다녔다. 식사 후에 인근에 있는 이한영 생가(李漢永生家)를 돌아보았다.
이한영(李漢永)은 낯선 이름인데 이번에 자세히 알게 되었다. 멀리 다산 정약용선생까지 올라가야 이분의 이력을 이해하게 된다.
이한영선생은 다산 정약용 선생과 초의선사로부터 시작되는 우리나라 차(茶) 역사의 맥을 이어온 다인(茶人)이다. 선생은 생시 '다선(茶仙)'으로 추앙되었다. 선생은 1890년대부터 우리나라의 최초의 녹차상표인 '백운옥판차(白雲玉版茶)'를 세상에 내놓았다. 백운옥판차라는 이름은 강진군 성장면 월하리 백운동에 있는 '옥판산의 차'라는 뜻에서 이름 붙여졌다.
이 차의 유래는 다산(茶山) 정약용이 강진 유배 이후 남양주로 돌아갈 때, 제자들과 ‘다신계’를 맺으면서 시작되었는데, ‘다신계’는 스승인 다산에게 해마다 차를 만들어 1년간 공부한 글과 함께 보내기로 한 약속으로, 이 약속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신의'였다. 다산의 가장 어린 제자였던 이시헌은 이 약속을 평생 지켰고, 집안에 전승되어 100년 이상 지켜졌는데 이 약속을 대를 이어 지켜온 사람이 이한영이다. 이한영은 어린 시절부터 차를 만들어 다산가(家)에 보내오다 후에 '백운옥판차(白雲玉版茶)'라는 상표를 만들어 판매했다.
백운옥판차(白雲玉版茶)는 최근에 태평양에서 상표등록을 추진했었는데 강진군민들이 강력하게 반대했다고 나오더니 아마도 태평양에서 양보한 모양이다. 지금은 강진군 브랜드로 사용하고 있다.
봄철에 유채꽃과 어우러진 강진 녹차밭을 방문하여 다향산방에서 차 한 잔 천천히 음미하며 여행의 완급을 조절하는 것은 어떠할까요?
이한영 생가(李漢永生家) 이한영(李漢永, 1868-1956) 선생은 다산 정약용 선생과 초의선사로부터 시작되는 우리나라 차(茶) 역사의 맥을 이어온 다인(茶人)이다. 선생은 생시 '다선(茶仙)'으로 추앙되었다. 선생은 1890년대부터 우리나라의 최초의 녹차상표인 '백운옥판차(白雲玉版茶)'를 세상에 내놓았다. 백운옥판차라는 이름은 강진군 성장면 월하리 백운동에 있는 '옥판산의 차'라는 뜻에서 이름 붙여졌다. 백운옥판차는 곡우에서 입하 기간 중 오전에 찻잎을 따 푸른빛이 사그라질 때까지 덖은 다음, 손으로 비빈(시루에 쪄서 비비기도 함) 후 온돌에 한지를 깔고 한 시간 가량 말려 옹기에 저장하는 제다기법(製茶技法)을 이용했다. 이때 선생은 차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백운옥판차라는 상표와 차 꽃을 도안한 포장지를 제작해 사용하였다. 선생은 원주이씨 29대 손으로 이곳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860번지에서 태어났다. 1939년 일본 다도의 명인 이에이리 가즈오가 '조선의 차와 선' 집필을 위해 이곳 생가를 방문할 당시 71세였던 선생은 일제 강점기에도 우리 전통의 제다기술과 다도의 맥을 이으며 민족정신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던 분이다. 현재 성전면 월남리 일대에 우리나라 최고의 녹차 재배단지(아모레 퍼시픽의 '설록차' 밭 등)가 조성되어 있는 것도 이 전통에 유래한 것이다. 강진군은 선생이 선보인 다도의 경지를 숭앙하고 그 민족의식을 길이 보전하기 위해 2010년 생가를 원형 그대로 여기 복원하게 되었다.<현지 안내문 직접 옮겨적음> 이한영(李漢永) 다부(茶父) 이한영(李漢永, 1868-1956)은 어렸을 때부터 차를 만들어 음용한 차인(茶人)이었다. 원주 이씨 29세손으로 자는 명중(明㑖)이며 1868년 8월 18일에 태어나서 1956년 10월 3일에 88세의 나이로 작고하였다. 평생 차와 함께 생활 하였고. 직접 찻잎을 채취하고 제다하여 유통에까지 참여하였다. 일제 강점기 시 우리 땅에서 나는 차가 일본의 차로 둔갑하는 현실에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우리 고유의 상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백운동 옥판봉에서 딴 차라는 의미로 ‘백운옥판차(白雲玉版茶)’ 라는 이름을 지어 반포한다. 백운옥판차의 유래는 다산(茶山) 정약용이 강진 유배 이후 남양주로 돌아갈 때, 제자들과 ‘다신계’를 맺으면서 시작된다.(1818) 다신계(茶信契)는 스승인 다산에게 해마다 차를 만들어 1년간 공부한 글과 함께 보내기로 한 약속이다. 다산의 가장 어린 제자였던 이시헌은 이 약속을 평생 지켰고 이 약속을 대를 이어 지켜온 사람이 이한영이다.<강진문화관광 홈페이지> |
문화재지정 | 미지정 |
문화재명칭 | 이한영 생가(李漢永生家) |
소재지 |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백운로 107 |
관리자(연락처) | 농업회사법인이한영생가 |
▼ 이한영 생가(李漢永生家) 이정표...
▼ 강진 월출산 아래에는 다원이 조성되어 있다. 태평양그룹 설록원이라고 한다. 제주도 설록원과 같은 회사에서 운영하는 것 같다.
▼ 월출산 녹차밭 중간쯤에 전망대를 만들어 녹차밭을 둘러볼 수 있도록 배려해 놓았다. 이곳에 이한영 선생이 다산 정약용 선생 집안에 100년이 넘게 차를 제공한 사실과 백운옥판차가 탄생한 내용을 적어놓았다. 안내판에 적힌 내용을 그대로 옮겨본다.
강진 월출산에 오래된 茶이야기가 있습니다.
달이 머물다 가는 월출산 자락에는 천년 넘게 자생하는 야생 차마무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전통 차문화는 고려시대에 이곳 월출산 야생 차나무 숲을 중심으로 꽃을 피웠습니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고려의 차문화는 쇠퇴했지만 이곳으로 유배를 온 다산 정약용 선생에 의해 그 가치와 제다법이 재발견 되면서 부흥기를 맞이합니다.
해배 이후 다산은 제자들과 다신계(茶信契)를 맺었는데 이는 다산의 제다법으로 해마다 차를 만들어 보내기로한 스승과 제자간의 차로 맺은 아름다운 약속이었습니다.
다신계는 가장 어린 제자였던 이시헌 선생의 집안에서 백년을 넘게 지켜졌고 자연스럽게 다산의 제다번이 계승 후손 이한영 선생의 백운옥판차로 이어졌습니다.
이한영 茶문화원에서는 지금도 옛 제다법 그대로 백운옥판차를 만들어 우리 차문화 천년의 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현장 안내문 직접기록>
백운옥판차(白雲玉版茶) 이 차의 유래는 다산(茶山) 정약용이 강진 유배 이후 남양주로 돌아갈 때, 제자들과 ‘다신계’를 맺으면서 시작됩니다. ‘다신계’는 스승인 다산에게 해마다 차를 만들어 1년간 공부한 글과 함께 보내기로 한 약속으로, 이 약속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신의'였습니다. 다산의 가장 어린 제자였던 이시헌은 이 약속을 평생 지켰고, 집안에 전승되어 100년 이상 지켜졌습니다. (참고문헌: 차이야기,1931,아유카이 후사노신) 100년이 지나갈 무렵, 이 약속을 대를 이어 지켜온 사람은 ‘이한영(1868~1956)’입니다. ‘이한영’은 어린 시절부터 차를 만들어 다산가(家)에 보내오다 40대 초반 일제강점기를 맞이합니다. 우리 땅에서 나는 차가 일본의 차로 둔갑하는 현실에 안타까운 마음을 가졌고, 우리 고유의 상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백운동 옥판봉에서 딴 차라는 의미로 ‘백운옥판차’라는 이름을 지어 반포합니다. ‘백운옥판차’는 찻잎크기와 제다방법에 따라 맥차(麥茶) , 작설(雀舌), 모차(矛茶), 기차(旗茶) 4등급의 차로 구분 하였습니다. ‘맥차(麥茶)’는 싹이 갓 돋아나온 어린 순을 딴 것으로 아주 소량만 만들어 다산가(家)에 보내었고, ‘작설(雀舌)’은 맥차 생산 후 싹의 끝이 둘로 갈라진 것, ‘모차(矛茶)’는 맥차 생산 후 싹이 셋 이상 갈라진 것, ‘기차(旗茶)’는 잎이 커서 넓어진 것을 말합니다. 백운옥판차가 만들어진 1920년대 초반은 1919년 3.1만세운동 이후 민족의식이 고양되었고, 또한 1920년대 초반에는 일본회사에서 생산되는 물건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선각자들에게는 국산품, 토산품을 애용하자는 물산장려운동을 벌어졌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 차의 포장 앞면에는 백운옥판차 상표인을, 뒷면에는 한반도를 꽃문양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꽃문양 옆에 쓰인 화제(畵題) '백운일지 강남춘신[白雲一枝 江南春信]'은 백운동 한가닥 나뭇가지에 날아든 강남의 봄소식으로 해석됩니다. 즉, 해방의 소식을 기다리는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백운옥판차'는 한국 최초의 차상표일 뿐 아니라, 스승 다산 정약용과의 약속을 100년 이상 지켜온 신의의 차이고, 우리 차의 정체성과 자존심을 지킨 차입니다.<이한영茶문화원 홈페이지> |
▼ 이한영 생가(李漢永生家) 앞에는 이한영 전통茶문화원이 있다.
▼ 이한영 전통茶문화원 입간판... 뒤로 생가가 보인다.
▼ 이한영 전통茶문화원... 백운옥판차(白雲玉版茶) 이야기라고 입구 현판처럼 적혀있다. ‘백운옥판차’는 곡우에서 입하 기간 중 오전 찻잎을 따 푸른빛이 사그라질 때까지 덖은 후 손으로 비벼(시루에 쪄서 비비기도 함) 온돌에 한지를 깔고 한 시간 가량 말려 옹기에 저장하는 제다기법(製茶技法)을 사용했다고 한다.
▼ 이한영 생가(李漢永生家) 안내판
▼ 이한영 생가(李漢永生家)
▼ 이한영 생가(李漢永生家)... 왼편이 사랑채이고 오른편이 안채이다.
▼ 이한영 생가(李漢永生家) 안채
▼ 이한영 생가(李漢永生家) 안채
▼ 이한영 생가(李漢永生家) 사랑채
▼ 이한영 생가(李漢永生家) 사랑채 측면
▼ 이한영 생가(李漢永生家) 사랑채 뒤면
▼ 사랑채에서 보이는 안채...
▼ 이한영 생가(李漢永生家) 인근에 한우체험관이 있어 이곳에서 식사를 했다. 주변에 유채꽃이 활짝 펴서 월출산과 함께 너무 아름다워서 식사보다 더 즐겁게 유채꽃을 감상했다. 이곳 녹향월촌 한우명품관은 9개마을 주민들이 투자한 한우 먹거리 체험관이라고 한다.
이한영 생가(李漢永生家) 주변에는 녹차밭, 유채꽃, 한우체험관, 차문화원, 월남사지 등 볼거리 즐길거리가 많아 흔히 말하는 일석오조쯤 되는 답사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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