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22. 2. 1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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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출산 아래 포근한 절 무위사(無爲寺)

 

강진 무위사는 오래전에 남도답사를 하면서 잠깐 들른 기억이 나는데 무위사극락보전을 보러갔었다. 이번에도 오로지 무위사 극락보전 하나만 생각하고 찾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극락보전 안에 모셔진 아미타여래삼존벽화도 국보로 승격되었다고 한다. 극락보전 안에 있는 아미타여래삼존벽화는 미쳐 사진촬영을 못해 문화재청에서 옮겨왔다.
무위사는 평지에 가까운 곳에 가람이 위치하여 편안하게 느껴지고 절간도 단촐하게 복잡하지 않아서 좋다. 무위사 극락보전은 조선초기 목조건물로 여러모로 수덕사 대웅전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봄날의 무위사는 새싹들의 향연을 펼치고 있어서 다른 날보다도 훨씬 운치가 있어보였다.

 

 

강진 무위사(康津 無爲寺)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의 말사이다. 신라 617년(진평왕 39)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관음사(觀音寺)라 했다고 전한다. 875년(헌강왕 1) 도선국사가 중건하여 갈옥사(葛屋寺)로 이름을 바꾼 뒤에 많은 승려가 주석했다고 하며 946년(정종 1) 선각국사(先覺國師)가 3차 중수하여 모옥사(茅玉寺)라 했고, 1555년(명종 10) 태감선사(太甘禪師)가 어명으로 중창하여 현재의 이름인 무위사라 했다고 한다. 그러나 경내에 있는 선각대사편광탑비(先覺大師遍光塔碑)의 명문에 의하면 신라시대에 이미 무위갑사(無爲岬寺)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최근까지 경내에 있던 목조건물은 극락전(국보 제13호)·명부전과 요사채뿐이었으나 1974년에 벽화보존각(壁畵保存閣)·해탈문(解脫門)·분향각(焚香閣)·천불전·미륵전 등을 새로 지었다. 이밖에 경내에는 946년에 세워진 선각대사편광탑비(보물 제507호)와 종형의 옥신을 가진 사리탑, 석탑형식을 한 부도가 있고 미륵전 안에 고려 말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불입상이 있다.
그리고 1955년 보수공사 때 무위사가 1476년에 크게 중창된 사실이 밝혀졌는데 이는 〈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도 일치하며, 극락전 안에 있는 목조아미타삼존불상 및 29점의 불화는 조선 초기 작품으로 중요시되고 있다. 현재 삼존불상과 후불벽화만 남기고 모두 벽화보존각에 보존되어 있다.<다음백과에서 인용>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康津 無爲寺 極樂寶殿) :국보13호
 
무위사는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원효대사가 관음사라는 이름으로 처음 지은 절로,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공사가 진행되면서 이름도 무위사로 바뀌게 되었다.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극락보전은 세종 12년(1430)에 지었으며, 앞면 3칸·옆면 3칸 크기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으며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조각이 매우 세련된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극락보전 안에는 아미타삼존불과 29점의 벽화가 있었지만, 지금은 불상 뒤에 큰 그림 하나만 남아 있고 나머지 28점은 전시관에 보관하고 있다. 이 벽화들에는 전설이 전하는데, 극락전이 완성되고 난 뒤 한 노인이 나타나서는 49일 동안 이 법당 안을 들여보지 말라고 당부한 뒤에 법당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49일째 되는 날, 절의 주지스님이 약속을 어기고 문에 구멍을 뚫고 몰래 들여다 보자, 마지막 그림인 관음보살의 눈동자를 그리고 있던 한 마리의 파랑새가 입에 붓을 물고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그림속 관음보살의 눈동자가 없다.
이 건물은 곡선재료를 많이 쓰던 고려 후기의 건축에 비해, 직선재료를 사용하여 간결하면서 짜임새의 균형을 잘 이루고 있어 조선 초기의 양식을 뛰어나게 갖추고 있는 건물로 주목 받고 있다.<문화재청>

 

문화재지정 국보 제13호
문화재명칭 강진 무위사 극락전 아미타여래삼존벽화 (康津 無爲寺 極樂殿 阿彌陀如來三尊壁畵)
소재지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1174
관리자(연락처)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대흥사의 말사 무위사

 

▼ 강진 무위사(康津 無爲寺)

▼ 강진 무위사(康津 無爲寺) 종합안내도...

▼ 강진 무위사(康津 無爲寺) 일주문

▼ 강진 무위사(康津 無爲寺) 사천왕문... 월출산이 포근히 감싸는 형국이다.

▼ 강진 무위사(康津 無爲寺) 사천왕문

▼ 무위사(無爲寺) 보제루

▼ 무위사(無爲寺) 극락보전 안내판... 영어는 뚜렷하게 보이는데 한글은 글자가 벗겨져 잘 안보인다.

▼ 무위사(無爲寺) 극락보전... 국보13호.

 

강진 무위사 극락전 아미타여래삼존벽화 (康津 無爲寺 極樂殿 阿彌陀如來三尊壁畵) : 국보 제313호
 

극락보전 후불벽 앞면에 그려져 있는 아미타삼존불벽화이다. 앉은 모습의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왼쪽에 관음보살이, 오른쪽에는 지장보살이 서 있는 구도를 하고 있다. 화면의 맨 위부분에는 구름을 배경으로 좌우에 각각 3인씩 6인의 나한상을 배치하고 그 위에는 작은 화불이 2구씩이 그려져 있다.
아미타극락회도 장면을 그린 이 벽화는 앞에 모셔진 아미타삼존불상과 매우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중앙의 본존불은 비교적 높은 연꽃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양어깨를 모두 감싼 옷을 입고 있으며 뒤로는 키모양의 광배가 표현되었다. 왼쪽에 서있는 관음보살은 머리칼이 어깨 위에 흘러내린 모습에 얇고 투명한 겉옷을 입고 있으며, 오른쪽의 지장보살은 오른손으로 석장을 짚고 왼손에는 보주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채색은 주로 녹색과 붉은 색을 사용하였다.
조선 성종 7년(1476)에 화원 대선사 해련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벽화는 온화한 색채나 신체의 표현 등 고려시대의 특징적 요소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간결한 무늬나 본존불과 같은 크기의 기타 인물 표현 등 조선 초기 불화의 새로운 특징들이 잘 나타나 있어 고려식 조선 초기 불화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문화재청>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 (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 보물 제507호
 
무위사는 전라남도 강진의 월출산 동남쪽에 있는 사찰이다. 신라의 명승 원효(元曉)가 창건하여 ‘관음사’라 하였고, 명종 5년(1550) 태감(太甘)이 4번째로 세우면서 무위사라 하였다. 이 탑비는 선각대사 형미(逈微)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고려 정종 원년(946)에 건립되었다.
선각대사는 신라 말의 명승으로, 당나라에 건너가서 14년만에 돌아와 무위사에 8년간 머물렀다. 고려 태조 원년(918)에 54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고려 태조가 ‘선각’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이름을 ‘편광영탑’이라 하였다. 이 비는 대사가 입적한 지 28년만에 세워진 것이다.
비는 비받침과 비몸돌, 머릿돌을 모두 갖춘 완전한 모습이다. 비받침은 몸은 거북이나,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형상으로 사나워 보이며 사실성이 뚜렷하다. 중앙에 마련되어 비를 직접 받치고 있는 비좌(碑座)에는 구름무늬와 둥근형태의 조각을 새겼다. 비몸에는 선각대사에 관한 기록과, 최언위가 비문을 짓고 유훈율이 해서로 썼다는 기록이 있다.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무늬를 새긴 3단의 받침이 있다. 중앙에는 비의 이름을 새겼던 네모진 공간이 있으나 마멸되어 글씨를 알아볼 수 없고, 그 주위로 구름속 용의 모습을 조각하였는데 이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 천상세계로 가기를 기원하는 의미이다.
각 부의 조각수법이 같은 시대의 다른 석비에 비해 사실적이며, 조각예술로서의 우수성을 나타내고 있다.<문화재청>

 

▼ 무위사(無爲寺) 극락보전에 모셔진 아미타여래삼존벽화... 국보 313호

▼ 무위사(無爲寺) 극락보전 주위 동,서 전각들...

▼ 무위사(無爲寺) 극락보전에서 바라본 보제루... 사방 어디를 봐도 아늑한 기운이 감돈다.

▼ 무위사(無爲寺) 극락보전의 측면... 수덕사 대웅전에서 본 면분할의 아름다움이 여기서도 느껴진다.

▼ 무위사(無爲寺) 선각대사탑비...

▼ 무위사(無爲寺) 미륵전과 산신각...

▼ 무위사(無爲寺) 미륵전에 모셔진 고려시대 석불입상...

 

▼ 무위사(無爲寺) 산신각 현판... 특이한 글씨체다.

▼ 무위사(無爲寺) 나한전

▼ 무위사(無爲寺) 삼층석탑

▼ 무위사(無爲寺) 성보박물관... 이곳에 극락보전 벽화를 보관하고 있는데... 코로나로 문을 닫아서 들어가질 못했다.

▼ 무위사(無爲寺) 종각

▼ 무위사(無爲寺)는 지금도 한창 불사가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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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